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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만든 법률에 의해 죽은 '상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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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만든 법률에 의해 죽은 '상앙'  
  • 강성률
  • 승인 2020.11.25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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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교수의 철학 이야기(20)

어느 날 상앙이 진나라 수도 남문에 석자 길이의 장대를 세우고는 “누구든지 이 장대를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는 황금 열 덩어리를 상으로 주겠노라”고 공포했다. 그러나 이를 수상쩍게 여긴 백성들은 아무도 옮기려 하지 않았다.

이에 상앙은 상금을 황금 오십 덩어리로 올렸다. 그러자 호기심 많은 어떤 사람이 용기를 내 장대를 북문으로 옮겼다. 상앙은 즉석에서 황금 오십 덩어리를 상으로 주었다.

상앙의 본래 이름은 공손앙으로 위나라 왕의 첩에게서 태어났으며 그가 나중에 진(秦)나라에 등용돼 상(商)이라는 땅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후 상앙(商鞅)이라 불리게 됐다.

효공에 의해 등용된 상앙은 법의 엄정한 집행을 위해 엄벌주의와 연좌제(죄인의 죄를 가족·친지들에게까지 묻는 제도), 밀고의 장려, 신상필벌(공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죄가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는 것) 등을 시행했다.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을 법률에 구속 받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공표하기 전에 준법에 대한 정부의 굳센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같은 일종의 이벤트를 선보였다. 그런데 하루는 태자가 법률을 위반했다. 태자는 임금의 뒤를 이을 사람인지라 관례상 벌을 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상앙은 태자를 대신해 그의 후견인인 공자 건을 처벌하고 또 그의 스승인 공손가에게는 얼굴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내리니 이로부터 진나라 사람들은 모두 법령에 따르게 됐다.

그런데 태자를 대신해 벌을 받았던 공자 건이 다시 법을 어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의 코를 베어내는 형벌을 가했다. 그러나 효공이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게 됐는데, 이 사람이 바로 혜왕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공자 건과 그 무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결국 관직에서 물러난 상앙이 상읍으로 돌아가는데 그의 행렬이 제후에 못지않았다.

상앙의 권세에 위협을 느낀 혜왕은 이 기회에 그를 아예 제거하기로 맘먹고 체포령을 내렸다. 이 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상앙은 급히 도망가다가 관하(關下)라는 곳의 여관에서 하룻밤 머물기를 청했다. 여관의 관리들은 그가 상앙임을 알지 못하고 “상앙의 법률에 여행권이 없는 자를 유숙케 하면 벌을 받게 돼 있습니다”라면서 거절했다. 이 말을 들은 상앙은 속으로 ‘아, 내가 만든 법률의 폐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 줄은 몰랐구나’라며 탄식했다.

상앙은 그 길로 위나라에 갔으나 곧 추방을 당했다. 다시 진나라로 간 상앙은 그의 무리들과 함께 북쪽의 정나라를 공격했다. 이 와중에서 진나라가 군대를 출동시켜 상앙을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혜왕은 상앙을 ‘두 대의 우마차에 나눠 묶어 놓고 각각 반대방향으로 말을 몰아 몸을 찢어 죽이는’ 이른바 차열(車裂)이라는 무시무시한 형벌로 처형하고는 그 시체를 여러 사람들에게 돌려 보게 했다.

또 상앙의 가족까지 모두 몰살시켰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상앙에 대해 ‘자신이 만든 법률에 의해 죽은 자’라고 희롱했다. 한편 진나라는 상앙이 쌓아올린 부국강병의 기반 위에서 더욱 강성해졌다. 상앙은 비록 비참하게 죽었지만 그가 정비한 법과 제도는 결국 후일에 진나라의 시황제로 하여금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국가를 수립하게 한 힘의 원천이 됐다.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인 상앙(?∼기원전 338년)은 사람들이 법을 잘 지키지 않는 이유로 첫째, 백성들이 정부에서 하는 일을 믿지 못하고 둘째, 고관대작들이 법률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이를 시정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지나치게 법을 엄격히 적용함으로써 결국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말았다.

[광주교육대학교 교수·철학박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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