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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 일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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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함께 일군 책
  • 양선례
  • 승인 2023.12.13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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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례∥(고흥)동강초등학교 교장

우연히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가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하고 50대의 아버지와 고등학교 1학년 언니와 산다. 그런데 그 아버지, 허리를 다쳐 일하지 않고 집에서만 있는 지 꽤 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언니와 함께 방을 썼는데, 올해는 그 언니가 기숙형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주말에만 집에 온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는 혼자 저녁을 먹는다. 자신의 집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걸 너무나 잘 안다. 일찍 철이 든 아이를 바라보는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열 명 넘는 글쓰기 부서 아이 중 한 아이만 남아

글쓰기 부서를 만들면서 전년도 담임에게 글을 좀 쓰는 아이를 추천받았다. 한 학년에 세 명에서 다섯 명씩 모두 열 명이 넘었다. 올해 목표를 설명하고 전년도에 글공부 동료가 만든 학생 작품집을 나눠 주면서 잘해 보자고 약속했으나 손가락 사이에 모래알 빠져나가듯이 하나둘 나갔다. 결국 수정이 혼자 남았다.

글은 ‘치유의 문학’이다. 텔레비전이 일상화되면서 라디오는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으나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지금도 건재하다. 전자책이 나오자, 종이책의 운명은 다하리라 여겼지만 출판 시장은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교육 선진국으로 일컫는 핀란드에서는 ‘다시 책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아날로그 방식으로 돌아가기를 권하고 있다.

기쁜 일이 있으면 그걸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글을 쓰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도 그 힘들었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감정을 글로 기록하고 싶어진다. 처음에는 막연하던 것도 막상 쓰기 시작하면 글이 글을 부른다. 쓰는 동안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미움도 괴로움도 멀리 사라진 걸 발견하게 된다.

글은 치유의 문학, 한 줄이라도 써야 늘어

그런데 사람들은 글을 쓰지 않는다. 아니 어려워한다. 성인을 대상으로 글쓰기를 가르치는 이 훈 교수님은 무엇이든 가치로운 것치고 쉬운 건 없다고 말한다. 운동을 처음 배울 때를 생각해 보라. 우리 학교 아이들이 요즘 점심시간마다 즐기는 배드민턴만 해도 처음에는 몇 번 오가지도 않아서 셔틀콕이 땅에 떨어져 버린다. 그래도 들인 시간이 쌓이면 실력이 늘고 점차 게임의 참맛을 알아 간다. 그러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급식 시간에 숟가락을 놓자마자 서로 먼저 경기장을 차지하려고 달린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도 그렇다. 머리로만 어렵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하면 잘 쓸까 궁리해 봐야 늘지 않는다. 한 줄이라도 써야 한다. 어제 한 줄이 오늘은 두 줄이 되고, 다음 달엔 열 줄로 쑥 불어난다. 먼 거리도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어느새 도착지에 다다르는 것처럼 글도 그런 작은 걸음이 쌓여서 길어지고, 내용도 풍부해진다.

수정이를 만나고, 지도하면서 나도 즐거웠다. 가르치는 사람의 가장 큰 즐거움이 무엇인가? 바로 제자의 성장을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1년간 여러 차례 만났다. 글쓰기는 만족감이 크면서도 즐거운 고통이다. 6학년이 자신의 일상을 긴 글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체험학습이나 수학여행을 가거나, 이런저런 학교 행사가 끝나면 글을 쓰게 했다. 아이는 글쓰기는 물론, 음악과 미술, 체육 등 다방면에 재주가 많았다. 2학기에는 학생회장이 되었다. 교육장과의 대화나 교육청에서 여는 여러 행사에도 편의를 봐주면서 참석하게 했다. 빚쟁이처럼 만나기만 하면 글을 내놓으라고 닦달하는 내가 아마도 미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특유의 성실성으로 글쓰기에 도전한 아이가 대견하다. 본인은 의지가 굳지 않아서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게 고민이라고 했지만, 약속을 잘 지키는 이런 성실성은 아이가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아이가 가진 잠재력이 무한하다는 걸 깨우친 귀한 시간이었다. 교직 35년 차지만 한 아이를 가르쳐서 이렇게 책까지 낸 건 처음이라서 아이는 물론, 내게도 특별한 시간이었다.

글을 쓰면서 ‘작가’의 꿈이 생긴 아이

처음에는 글쓰기 공책을 만들어 거기에 글을 쓰게 했다. 그런데 고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어차피 책을 만들려면 파일로 저장해야 했기에 컴퓨터로 쓰기를 권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독수리 사촌이 아닌가. 무엇이 가장 편하냐고 물으니 세상에, 휴대폰으로 쓰는 거란다.

역시 요즘 아이다. 그때부터는 엄지손가락 두 개로 글을 써서 보냈다. 글의 차례, 작가 소개, 책을 펴내는 소감까지 아이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 기다렸다는 듯 아이는 그 일을 금방 해냈다. 표지 그림까지 약간의 힌트만 주니 뚝딱 그렸다.

"나처럼 형편이 좋지 않아도 가르칠 수 있는 한 사람만 있어도 성장할 수 있다. 글을 쓰다 보면 조금씩 새로운 희망이 생긴다. 나는 꿈이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엮으면서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하나 생겼다. 운명의 짝꿍만 있으면 어디든 나아갈 수 있다."

아이가 쓴 ‘작가의 말’ 일부분이다. 올해 바로 내 그 짝꿍이 되었으니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수정이는 이제 곧 중학생이 되고, 나 역시 공모 교장 만기라서 내년에는 이 학교를 떠난다. 아이와의 인연이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곁에서 지켜보고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하도록 작은 힘이라도 보탤 것이다. 이 아이를 응원하는 어른이 주변에 꽤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문해력이 화두지만 글쓰기는 어른도 어려워하는 영역

양선례 교장

문해력이 화두이다. 그 문해력의 최고봉이지만, 어른도 하기 힘든 게 글쓰기다.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글로 풀어내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다. ‘내 글을 읽고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할까?’를 의식하기 시작하면 한 줄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그런 마음을 딛고 글쓰기에 도전한 수정이를 아낌없이 칭찬한다.

더불어 수정이의 오늘이 있기까지 응원하고 가르쳐 준 4, 5, 6학년 담임 선생님과 아이의 처지에 공감하고, 사랑으로 지켜봐 준 박정미, 박형민 선생님이 고맙다. '학생, 한 권의 책이 되다'를 기획하고 이렇게 책을 엮을 수 있게 기회를 준 전라남도교육청 관계자분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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