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신의 한 수
상태바
신의 한 수
  • 양선례
  • 승인 2023.05.30 15: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선례∥동강초등학교장

중간 놀이 시간에 청백 이어달리기 연습 경기가 있었다. 유치원은 운동장의 4분의 1, 초등학생은 2분의 1을 돈다. 전교생이 다 참여하기에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아이들이 가장 재밌어하는 운동회의 단골 종목이다.  백군과 청군이 엎치락뒤치락 반전을 거듭하다가 청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런데 함께 구경하던 교감 선생님이 날짜를 하루 앞당기면 어떻겠냐고 묻는다. 당장 내일 하자는 건데 그게 가능할까, 괜히 선생님들 힘들게 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선생님들이 원한다면 무조건 따르겠다고 말했다. 결국 운동회는 하루가 당겨졌다. 다른 학교처럼 외부 업체를 불렀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100명 이하의 소규모 초등학교 운동회는 이벤트 업체에 많은 돈을 주고 위탁하는 행사가 되었다. 알록달록 화려한 놀이 기구에, 매끄러운 말솜씨를 자랑하는 사회자가 등장한다. 천장까지 닿을 것처럼 키가 큰 스피커에서 흥겨운 음악이 빵빵 터진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게임이 시작되면 이벤트 업체 직원이 알아서 아이를 인솔하여 팀을 나누고, 줄을 세운다. 그 틈에 다른 직원이 준비물도 척척 정해진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경기 진행하는 사이사이 흥을 돋우는 경품 추천과 선물 공세도 이어지니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한 달 전부터 계획을 세워 운동회 종목을 고르고, 순서를 정한다. 창고를 뒤져 쓸 만한 놀이 기구를 챙기고, 사야 할 것을 품의한다. 또 며칠 전부터 중간놀이 시간이나 체육 시간에 입퇴장 훈련과 학년별로 이어지는 경기를 사전에 연습한다. 그 모든 수고가 이벤트 업체를 부르면 한 방에 해결된다. 교사는 아이들 관리만 하면 되니 예전보다 일감이 줄었다. 교사 처지에서는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14학급, 면 단위 학교로 초임 발령을 받았다. 두 달 만에 봄 운동회가 열렸다. 내가 담임하는 4학년은 세 반이다. 그런데 막내인 내게 무용을 하나 만들어 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지금처럼 너튜브가 있었다면 얼마나 편했을까. 춤과는 멀고도 먼 사인데 어쩌나.

선배의 도움을 받아 부랴부랴 안무를 짜고 수업 시간을 빼서 아이들을 지도했다. 강당이 없었기에 운동장 구령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잘 따라오지 않는 아이를 상대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운동장을 쓸 수 있는 시간도 학년별로 정해졌다.

여러 날 연습하여 운동회 당일, 학부모들 앞에서 공개했다. 그동안 고생한 보람도 없이 순식간에 끝났다. 허무했다. 무용은 그래도 나았다. 고학년은 기마전과 부채춤, 또 다른 학년은 곤봉이나 깃발, 훌라후프 등을 이용한 매스 게임이나 농악놀이, 강강술래를 하기도 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이 뒤에서 흙먼지도 덩달아 풀썩였다. 공연은 5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수업 시간 침해는 엄청났다. 그 시절엔 그게 당연했다.

20여 년 전, 섬에 근무할 때였다. 운동장 가장자리에 마을별로 천막을 쳤다. 일곱 개 자연부락에서 각자 음식을 해 오고, 농악단도 꾸려서 공연했다. 학부모와 마을 주민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운동회의 마지막은 마라톤이 장식했다. 학교에서 부두까지 왕복으로 다녀오는 거였다. 마을의 명예를 건 청년들이 선수였다. 우승자에서는 20kg 쌀 한 포대가 내 걸렸다. 운동회는 마을의 잔치였다. 그 시절이 아득하다.

보여 주기식 운동회가 언제부턴가 마당놀이로 바뀌었다. 학년별로 대여섯 개로 정해진 놀이를 반별로 돌았다. 아이들이 운동장 가운데서 노는 동안 이번에는 지켜보는 어른이 심심해했다. 분명 어릴 때는 힘들어했을 텐데 먼지 구름 날리며 운동장을 휘젓고 다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했다. 아이들도 생각만큼 재밌어하지 않았다.

큰 학교에서는 운동장은 하나요, 학생수는 많다 보니 기껏 한두 종목 참여하고 그늘에 앉아서 쉴 때가 많았다. 물 마시러 가고 싶다, 화장실 갔다 온다, 저기서 엄마와 할머니가 기다린다. 이유도 핑계도 많아 자꾸만 빠져나가려고 하는 아이들 관리하기가 더 힘이 들었다.

우리 학교는 코로나 이전에는 이벤트 업체를 불러서 운동회를 했다. 코로나 시대 2년은 그조차 하지 못했고, 작년엔 약식으로 했다. 올해는 막혔던 물꼬가 트이듯, 동문회나 동창회는 물론, 지역 축제도 앞다투어 열리고 있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모든 교육 활동을 코로나 이전처럼 운영한다. 그런데 진행 업체를 알아보니 우리가 계획했던 날에 올 수도 없을뿐더러 그 금액이 무려 220만 원이란다.

하루 종일도 아니고 오전 세 시간, 그것도 국민의례, 모범 어린이 표창, 국민체조 등을 빼고 나면 실제로는 두 시간 반쯤에 불과한 데도 그렇게 비싸단다. 다른 업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날짜를 옮겨야 할 판이었다. 업체 사정에 따라 학교 행사가 좌지우지되는 형편이다. 어찌나 경쟁이 치열한지 1년 전에 미리 예약해야 원하는 날에 올 수 있다니, 놀랍다.

예전과 달리 외부 강사가 다양한 명목으로 수업 시간에 굉장히 많이 들어온다. 숲 체험, 민주 시민 교육, 인성 키움 교육, 학교 폭력 예방 교육, 성교육 등 그 영역도 다양하다. 최근에는 마을 학교 교사까지 생겼다. 바야흐로 누구라도 가르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 명의 교사가 여러 교과목을 가르치는 초등학교에서 교사 한 명이 전 영역에 전문성을 발휘하기는 힘들다. 외부 강사를 불러서라도 깊이 있는 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효과적이다. 그러나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조차 단지 편하다는 이유로 영역을 조금씩 내 주다 보면 교사의 설 자리가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이다.

운동회도 그렇다. 별다른 고민 없이 예년에 그래 왔으니까 당연하게 외부 업체를 부르는 건 문제이다. 학교 행사도 엄연히 교육의 영역이다. 신체 활동을 하면서 친구와 어울리고,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뤄 승자에게 박수를 치는 과정을 거치면서 우정과 협동, 배려심을 배운다. 그런 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 스스로 날려 버리지는 않는지 구성원이 머리를 맞대고 한 번 더 고민해야 한다.

양선례 교장

협의 끝에 우리 학교는 자체적으로 운영했다. 계획 단계부터 함께 했기에 당일에는 교사의 자발성이 특히 돋보였다. 네 일, 내 일이 없이 서로 돕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세워 둔 예산으로는 청군과 백군에 어울리게 색깔을 달리한 질 좋은 티셔츠와 맛난 간식을 전교생에게 선물했다. 끝나고 난 뒤의 보람과 성취감도 컸다. 몸은 조금 힘들었지만 수업 침해도 이벤트 업체 배 불리는 일도 없이 끝났다.

이튿날에는 전국에 단비가 내렸다. 봄 내내 찔끔거려서 해갈에 도움이 안 되던 비가 아니라, 여름 장맛비처럼 몽땅 쏟아졌다. 날짜 옮긴 게 ‘신의 한 수’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