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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내 강정등 하얀 붓꽃, 그리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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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내 강정등 하얀 붓꽃, 그리고 아버지
  • 이기홍
  • 승인 2023.05.05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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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前 목포교육장

올해도 아시내 강정등에 붓꽃(사진)이 하얗게 피었다. 지난겨울에 힘들었는지 몇 군데 빠진 곳이 있긴 하지만 작년보다는 더 많이 피었다. 하얀 붓꽃을 보고 있노라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한동안 강정등 솔밭에 머물게 된다. 

하얀 붓꽃은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마당에 심어놓고 보시던 꽃이다. 아버지는 꽃을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집안의 분위기를 위해 내가 일부러 꽃을 심은 것을 보고 어디서 구했는지 어느 날 붓꽃 몇 뿌리를 가져와 마당에 심어놓고 내가 인정해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시기도 했던 꽃이다.

아버지 살아생전에는 잘 생기지도 못한 붓꽃을 나는 애지중지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하얀 붓꽃을 유심히 보게 됐고 붓꽃을 볼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나게된 것이다. 그러다 집안에만 놔두면 언젠가는 없어져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몇 해 전에 동네 어귀인 강정등에 대부분을 옮겨 놓았다. 

붓꽃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아버지가 그립다. 난 아직까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없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 할지 두렵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귀천하시던 날, 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까닭 모를 죄의식으로 온몸이 죄어왔다. 아버지 염을 하던 날, 나는 처음으로 사람이 죽으면 꽃신을 신는다는 것을 알았다.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아버지의 손발을 만지며 난 목울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 눈물은 그 후 아버지를 생각하며 흘린 눈물의 시작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을묘년(1915년) 삼월 보름날, 장남으로 태어났다. 구림 보통학교를 나와 목포의 문태중학교를 중퇴했다.

아버지는 경제력이 약한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당시 큰 지주로 부자였던 큰할아버지의 집사 노릇을 했다. 그것이 힘이 되어 정부미 도정 공장도 운영했다. 그러다 도정공장 운영에 실패하여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궁핍해졌다. 아버지는 그 가난 속에서도 열심히 사회활동을 했다. 말하자면 면 단위 출입을 왕성히 한 것이다.

경조사에 빠짐이 없었고 감투 또한 많이 썼다. 이장, 조합 이사, 육성회장, 새마을 지도자, 문중계 도유사, 진흥회장, 영농회장, 농촌 지도자 등, 시대를 달리하며 농촌에 나타났던 그 수많은 자리를 비켜가지 않았다. 노년에는 면 노인 회장을 맡아 일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꼭 목표를 정해 일을 했다.

여름날 담배를 엮을 때도 그냥 엮는 법이 없었다. 몇 두름을 엮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작업을 했으며, 그 목표가 달성되지 못할 경우 자정을 넘기기가 일쑤였다. 가난한 시절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며 담배를 엮던 아버지 모습이, 독내장이 열리는 전날 밤 어머니와 상의하며 장에 내다 팔 마늘을 엮던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 서러움으로 다가온다. 

아버지는 정부에서 권장하는 온갖 농사를 다 했다. 피마자(아주까리), 박하, 생강, 유채, 이른 나락, 절간고구마, 마늘 등 그러나 그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동네 분들의 비웃음과 실패였다. 아버지는 자투리 시간만 나면 수확해온 피마자를 손이 다 부르트도록 껍질을 벗겨 상품을 만들었으나 팔리지 않았다. 향수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아니 된다기에 심었던 박하는 아무도 사가지 않아 결국은 불태웠다.

생강도 우리가 갈던 해에는 너무 많이 나와 형편없는 가격을 받았고, 절간고구마도 건조에 실패해 등외 판정을 받아 돈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농촌지도소에 다니며 선진농업기술을 배운 아버지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평소 나는 아버지가 위정자들을 욕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모두가 앞다투어 욕을 할 때도 아버지는 적어도 우리들 앞에서는 그들을 욕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게 엄청난 가르침이었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내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아버지는 정말이지 건강했다. 위생에도 대범했고, 먹는 것도 소탈했으며, 병치레 한번 없이 돌아가시기 두해 전까지 건강한 몸으로 살았다. 작은 기침감기도 아버지 주위를 맴돌지 못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한시도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집안의 가장이 가야만 했던 질기고도 모진 신체 적응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언제나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과감히 도전했으며 끝까지 성취해 냈다. 아버지는 거친 일을 하는 데도 며칠이 지나면 손에 윤기가 흐르고 선비의 손처럼 부드러웠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집안에서 일군이나 부리고 살면서 자신은 전혀 농사일에 손을 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고운 손으로 쓴 아버지 글씨는 세련됐으며, 그것은 근동의 사우에 자주 헌관으로 초대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가마솥 같았다고 생각된다. 신 새벽 어머니가 밥을 지을 때면 아버지는 언제나 밥솥에 불을 지폈다. 잦은 부인병으로 어머니는 아침이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배를 움켜쥐고 온몸을 뒤틀며 소리를 질러대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신음 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에서 마당을 쓸었다.

더 이상 쓸 것이 없는 데도 아침을 쓸고 또 쓸었다. 그때 아버지가 대빗자루로 쓰신 것은 마당에 널린 쓰레기가 아니라 마당으로 쏟아져 내리는 아내의 신음 소리였으리라. 큰 병원 한번 데려가지 못한 당신에 대한 분노도 포함되었으리라. 그렇게 모진 세월은 갔다.

내가 장성해 아버지를 경제적으로 도울 때, 아버지는 그것을 너무나 좋아했다. 한 평생 월급이라고는 받아 본 적이 없었기에, 적지 않는 급료를 받는 아들의 월급날이면 아버지는 자랑스러워했다. 실질적으로 그 돈에 대해 권한을 갖지는 못하였는데도 아버지는 내 월급을 언제나 마음속으로 세고 또 셌다.

마을 앞에 반듯한 논 한 뙤기 없기에, 손익을 떠나 물골 논이라도 사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뜻에 순응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이를 무척 서운해했다. 아버지는 내 삶의 멍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며 이런저런 일을 저지를 때마다 처음에는 반대하고 역정을 내다가도 결국은 좋아하고 또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막무가내로 집 짓기를 시작할 때도 그랬고, 터무니없는 비싼 가격으로 상가를 사 새로 지을 때도 그랬고, 아파트를 분양받아 집들이 없이 어머니 수연을 치를 때도 그랬다. 작은 아버지와의 해묵은 재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은 아버지에게서 논을 사들였을 때도 아버지는 그 가지런한 누런 이를 드러내놓고 오래도록 크게 웃었다. 좋을 때면 언제나 얼굴을 쳐들고 건강한 누런 치아가 다 드러나도록 웃던 그 모습, 때로는 정지 화면으로 때로는 동영상으로 내 가슴에 살아있다.

이제는 아시내에 들어설 때마다 아버지가 들여왔던 일 년 내내 잎이 시들지 않는 붓꽃을 의식하게 된다. 붓꽃은 여러해살이풀로 꽃봉오리가 먹을 머금은 붓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붓꽃 잎은 난처럼 길고 뿌리는 소화불량, 치질 치료에 효용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 겨울에도 푸른 잎을 자랑한다. 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구입한 제주도 돌하르방을 아버지 꽃으로 피어있는 붓꽃 옆 아시내 강정등에 세웠다. 먹물을 머금은 새하얀 붓꽃은, 그리움을 머금은 아버지 붓꽃으로 피어나 돌하르방을 벗 삼으며 아시내를 찾는 길손을 맞이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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