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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용연학교 급식실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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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용연학교 급식실 엄마
  • 박주정
  • 승인 2023.04.05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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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정의 콩나물 교육(14)

2008년 3월, 나는 한가지 결단을 내렸다. 부적응 학생이 누적되고 중도탈락 학생이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만 갔다. 매년 중학생 200여 명이 학교를 중퇴하고, 부적응 학생이 900여 명에 이르는 현실이 눈앞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광주에 단기 과정인 ‘금란교실’을 만들어 잘 운영하고 있었지만, 중장기적으로 부적응 학생을 위한 ‘학교’가 필요했다. 광주보호관찰소 범죄예방특별선도위원, 금란교실의 추수지도위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활동한 광주학생생활지도연구회원 등이 주축이 된 100人들과 사단법인 ‘광주청소년교육원’을 창립했다.

여기서 태동한 것이 우리나라 근대교육사에 현직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후원금을 내서 위탁대안학교를 만든 첫 사례가 바로 ‘용연학교’이다.

용연학교는 지각생이 많았다. 지각이 문제가 아니라 학교에 등교만해도 고맙고 다행한 일이었다. 우리는 쉽게 나타난 현상이나 규율에 맞지 않는 행동만 보고 판단하는데 조금만 더 학생 입장에서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생각을 갖게 된다. 이 정도의 환경에서도 아이들이 버티고 견뎌낸다는 사실에 숙연해질 때가 많다.

부모가 없거나,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니 일찍 일어날 수가 없었다.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교직원들 모두가 늦게 오면 늦게 온 대로 받아주고 안아주었다. 아침밥은 대부분 먹지 않고 등교했다. 우리는 급식실에 테이블을 놓지 않고 옛날 밥상처럼 편하게 앉아 먹게 했다.

가정집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급식실에서 봉사한 여사님은 학생들을 자식처럼 따뜻하게 대하면서 한 명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를 썼다. 어버이날이었다.

한 학생이 아침밥을 준비하고 있는 이른 아침에 등교해서 급식실을 찾아왔다. 문을 열더니 급식 봉사 여사님을 향해 ‘엄마’라고 크게 불렀다. 저 학생이 왜 나에게 엄마라고 하지 생각하면서 주변에 누가 있나 둘러봤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다시 엄마라고 더 크게 불렀다. 여사님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나’니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학생은 문을 닫고 가버리고 여사님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여사님의 ‘엄마 이야기’를 듣고 그 학생을 찾아봤다. 4살 때 엄마, 아빠에게 버림받았고, 조부모에게 전전하다가 거기서도 쫓겨나 시설에서 근근이 용연학교에 다닌 학생이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일까, 엄마 정이 그리워서일까. 엄마 같이 대해주시니 어버이날 급식실에 찾아와 ‘엄마’하고 불러본 것이다.

지금도 용연학교를 만들어서 엄마 역할을 해주신 그 여사님을 잊지 못하고 있다. 용연학교를 만든 이유도 엄마, 아빠처럼 학생들을 대하고, 어떤 경우라도 모두를 안고 가고 싶었던 것이다. 용연학교보다는 용연가족이란 말이 설립 취지에 가까운 의미이다.

수업 중에도 도저히 집중하지 못하면 학교 주위에서 쉬게 했다. 노래를 부르고 싶으면 수업하다가도 노래 부를 수 있도록 노래방도 만들어 놓았다. 담배를 끊기가 어려워서 힘들어할 때는 지정된 장소에서 피우도록 묵인해주기도 했다.

사실 처음 용연학교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매우 심했다. 골목이나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고, 학생인지 건달 소년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복장, 두발 등을 보면 주민들 탓만 할 실상도 아니었다. 학생 생활지도에도 신경을 썼지만 주민들의 이해를 구하는데도 나름 정성을 다했다. 교도소에 가야 하는 나쁜 아이들이 아니라 단지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하고 이 시기만 지나면 훌륭하게 성장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우리가 예견한 대로 아이들은 용연학교를 졸업하고 대부분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대학을 갔다. 용연학교 출신이라고 의기소침한 것이 아니라 떳떳하게 말하면서 자랑스럽게 다닌다고 했다. 상처가 지나가고 새살이 돋는 회복의 과정으로 접어든 것이다.

아이들에게 가장 부족했던 자존감을 높여주고 한 인격체로서 대접해 준다는 용연 가족들의 교육적 결실인 것이다. 수많은 졸업생들이 보내온 글을 보면 청소년기 아픈 상처 위에 자존과 자긍심이 자라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용연학교의 모두는 엄마였고, 선생님이었고, 아들딸이었기에 용연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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