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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는 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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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나는 이완용
  • 박 관
  • 승인 2023.03.23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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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관∥칼럼니스트·본지 논설위원

이완용. 그가 누구인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세종대왕님과 이순신 장군님 다음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인물 중에 하나다. 불행히도 우리 민족의 가장 매국노의 상징으로 떠오르는 인물로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118년 전 을사늑약이 체결될 당시 가장 앞장서 활약을 했고 그 후 일본의 통치 기간에도 혁혁한 공훈을 세운 사람 아니던가. 

그런데 2023년 계묘년에 갑자기 이완용이 부활한 듯한 징조가 나타났다. 윤석렬 정부가 3.1절 기념사부터 묘한 뉘앙스를 풍기더니만 결국‘강제징용문제는 ’3자 변제‘ 로 해결하고 일본과의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발전해 나간다’고 선언해 버렸다.

통 큰 외교정책으로 주변국들의 동조를 얻고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한다는 미명으로 국민적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고약한 강단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힘인지 알 수 없다. “언제까지 끌고 갈 것인가?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진다”는 말도 빼놓지 않고 했단다.

그런 말은 보통 상황이 몹시 위급하다거나 시간을 다투는 때에 지도자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거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 쓰이는 순기능적인 면도 있긴 하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반대한다거나 신중하기를 바라는 의견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막무가내로 입을 막아버리는 독재성 발언을 할 때 주로 쓰이는 악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완용을 다시 보라. 조선말 당시에 최고의 엘리트였던 그가 일본에 나라를 송두리째 내어준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나서 “혹시 내가 나라를 팔아먹은 일을 해버리지 않았을까?”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본 순간이 있었을까? 그런 일은 단언컨대 없다. 오히려 “나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다. 나의 뛰어난 선택이 쓰러져 가는 대한제국을 살리는 최선의 길이다”라고 자평했으리라.

영토확장에 혈안이 됐던 열강들의 각축 속에서 누구보다 국제 정세 흐름에 밝았고 영악했던 그의 선택이 어쩌면 최선의 길이었는지 모른다. 적어도 36년이 지나 해방이 될 즈음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영악하기만 한 그가 빠트리고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다. 아니 아예 그런 의식이 없기에 그의 머리로는 감히 생각해 낼 수 없는 계산법이다.

그것은 바로 자주성과 민족성이다. 특히 국가 간의 외교에서는 이것을 제외하고 얻을 수 있는 이익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완용의 개인적인 판단 착오가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많은 자존의 상실과 수치를 안겨주었는지는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이기에 굳이 설명하기에는 진부할 뿐이다. 그런데 그 악령이 또 나타났으니 이를 어찌해야 할꼬.

118년 전 을사년에는 서울에서 악령이 나타나더니만 2023년 계묘년에는 도쿄에 가서까지 악령이 돼 돌아왔다. 이완용의 셈법과 윤석렬 정부의 대 일본관은 그 맥락이 같다. ‘잘사는 이웃 나라인 일본과 친해져야지만 우리나라의 경제가 발전해 갈 것이라는 셈법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완용의 셈법은 윤석렬 정부의 셈법보다 훨씬 영리하고 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때 당시의 일본은 우리나라와 비할 바가 아니게 부강한 나라였기에 빌붙어서 얻어먹을 거리라도 마련할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다르다. 우리나라도 세계 10대 경제 대국에 속하며 일본보다 GDP가 조금 많아졌을 정도로 안정된 국가로 성장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으로부터 무엇을 더 얻어먹어 보겠다고 국민의 자존을 이렇게 긁어내리는지 도대체 모를 일이다.

백번 양보해 1965년 한일 협약으로 일본이 우리나라에 준 돈이 있기에 더는 경제보상에 대해서는 논하지 말자고 치자. 조금은 구차스러우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침략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받아내야만 되지 않는가? 그것조차도 요구할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무슨 나라이겠는가. 대일관계는 아직도 경제의 문제를 넘어서 자존의 문제가 우선이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정서요, 감정이 아닌가. 이완용보다 못한 국제 정세의 감각을 가진 현 정부의 심판을 정치권(야당)에서는 온전하게 응징할 수 없다. ‘반일 감정 조장’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그 파장을 넓혀 나가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위기가 있을 때마다 일반 백성의 애국심과 투혼으로 이끌어 져 왔다.

3.1만세 운동이 그러하고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 등이 그러하지 않았던가. 현 정부가 지금 취하는 대 일본관을 보면서 보수와 진보의 양극화 진영 속에 매몰되어 사는 이 시대의 우리에게 진정한 우리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국으로 발전했으면 한다. 

‘오호통재라. 이날 목놓아 통곡하노라.(시일야방성대곡)’라고 울분을 토했던 대한제국 백성의 통탄이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후손에게까지 전수되는 것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비극의 역사는 절대 답습하고 싶지 않기에 희극의 역사이기를 바란다.

그런 희극을 연출할 수 있는 주인공은 바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의식이요, 민족정신일 뿐이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이완용이 불현듯 나타나 반면교사의 훈수를 두고 간다.

“후세 인들이여! 제발 나 같이 살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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