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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것을 배워야 할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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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것을 배워야 할 두 사람
  • 박 관
  • 승인 2022.09.12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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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관∥칼럼니스트

손자병법에서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36계(三十六計)’라는 계책이 있다. ‘주위상(走爲上)’이라고 하는데 도망하는 것도 뛰어난 계책이라는 뜻이다.

보통 “줄행랑을 친다”고도 하고 좋은 말로는 ‘작전상 후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전쟁터에서 무조건 ‘돌격 앞으로’만을 외치는 장수의 전략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이 보(二步) 전진을 위한 일보 물러섬’의 작전을 구사하는 장수의 책략이 더욱 승리의 길로 가는 요령이리라.

예로부터 싸움에서 불리하게 되면 지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래야만 다음을 도모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질 줄 아는 사람은 대단히 유연한 사람이고 유연함이 곧 큰 사람의 바탕이 된다.

최근 대한민국에 언변술이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두 인물이 출현했다. 한 사람은 장관이요, 또 한 사람은 당 대표다. 전자(前者)는 검찰이 가지고 있는 순기능적인 공정과 정의의 뒤안길에서 못된 법꾸라지의 작태를 일삼아 온 검사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안하무인격의 검찰 문화가 만들어 놓은 산물이다. 후

자(後者)는 사회정의를 부르짖는데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추구에 훨씬 더 많은 가치를 두고 사는 젊은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이다. 이들과 말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기에 괴물 같은 느낌이 든다. 이들의 말투를 보면 두렵기도 하거니와 무섭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두 사람이 모두 상대적으로 젊다는 것이다. 젊다는 것은 웅대한 꿈이 있고 무한한 도전 정신이 있기에 아름답다. 이것은 노년 세대가 자신들의 젊은 시절에 겪어 보았던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평가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무한 찬사와 응원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기존의 기성세대들보다도 더한 아집과 오만이 가득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싸가지가 없다.” 우리 사회에서 이것보다 더 큰 결함이 어디 있겠는가. 요즘은 어른들이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예의를 갖추어 대하는 경우가 많다. 젊다는 것은 기성세대로부터 이해받을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것이지 기존세대보다 더 낫다는 의미가 전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둘째, 그들은 누구에게나 절대로 질 수 없다는 확신으로 살아간다. 자신들이 마치 승리의 화신이라도 된 듯한 착각 속에서 맹수처럼 저돌적으로 공격하는 방법만을 구사한다. 그리하여 논쟁에 들어갔을 때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상대를 이겨야 한다는 일념만이 앞선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고 본의 아니게 착각도 하기 십상이다.

그러하기에 상대의 잘못에 대해 용서도 하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인격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기의 성찰을 하지 못하고 형성된 인격이 오죽하겠는가? 그들에게 양보나 용서 따위는 자신들의 삶 속에서는 전혀 용납되지 않는 사치나 허구에 불과한 구차스러운 용어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막히지 않는 대화술이다. 이른바 보수주의자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이들 또한 원론적인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법의 집행이 공정하게 되고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않고 “법은 늘 공정하고 정의롭게 법치에 맞게 갑니다”하고 답변하거나 “깡패들 수사를 왜 못하게 막은 겁니까?”하고 래퍼(Rapper)들이 편안하게 노래 부르듯이 읊조린다.

이른바 ‘래퍼 화법’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화법은 의제와는 크게 상관없이 그냥 씨부렁거림밖에는 없다. 또한 “당신은 성 접대를 받았습니까”하고 물으면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당 대표의 법적 대응만을 요란하게 이야기하는 그들의 대화법은 한마디로 말해서 진실과 본질이 전혀 없는 겉 다리 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래퍼 화법을 구사하기에 논쟁을 하는 과정에서 말이 별로 막히지 않고 술술 터져 나온다.

그래서 혹자들은 이들을 화술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상식이 있는 국민은 현란한 화술을 앞세워 상대를 이겨 먹으려는 꼼수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국민을 사랑해 보통의 일들에 공감하고 지켜주려는 안정된 지도자를 원한다.

이 두 사람의 말하는 태도를 보면 얼핏 고대 그리스 시대 소피스트(Sophist)들의 궤변을 듣는 듯하다. 나름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현란한 말솜씨에 ‘현자’라고 까지 칭송을 받았던 그들에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소피스트들의 역사를 아는가? 그들은 논쟁에서 이기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을 꾸미거나 거짓을 참인 것처럼 늘어놓아 대중들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하기도 했다.

수 천 년이 흐른 오늘에 와서 두 사람의 언변술이 왜 그 당시 법정 근처에서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소피스트들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지 모르겠다. 본인은 절대 져서는 안 되는 인물이고 질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믿고 사는 두 사람에게 손자병법의 ‘36계’를 권하고 싶다. 세상을 참되게 살아가려면 지는 방법도 배우라는 말이다.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가르침이 있다. 머릿속에 아무리 많은 것을 배우고 쌓은 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본질의 문제에 다가서지 않고 그럴싸한 화법과 수식으로 처신하려는 행태는 너무 얄팍한 삶에 불과하다.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못 배운 사람과 힘이 약한 사람을 위하고 도와주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리라.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바뀐다 할지라도 염치를 느낄 줄 알고 질 줄 아는 마음으로 살아감이 어떠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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