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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용호
  • 승인 2010.07.08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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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호∥前 광주시교육청 장학담당 장학관

탕! 탕! 탕!

1909년 10월 26일 9시, 하얼빈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는 기차 안에 들어 온 코코흐쵸프와 20분 정도 대화를 나눈 뒤 가와카미 도시히코 영사의 안내에 따라 열차에서 내려 러시아와 청나라 군대, 각국 외교사절, 러시아와 청나라의 문무대관, 환영 단체들이 정렬해있는 곳으로 걸어가면서 악수를 나누었다.

이윽고 이토가 일본인 단체 쪽으로 돌아서려는 순간, 안중근은 권총을 꺼내 들었다. 곧 천지를 진동하는 총소리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가 차가운 보도 위에 쓰러졌다. 깜짝 놀란 남만주철도회사의 총재 나카무라 고레키미가 이토를 부축해 기차 안으로 옮기고 주치의 고야마가 붕대로 응급처치를 했지만 30분 만에 숨이 끊어졌다. 국적 이토 히로부미는 그렇게 사망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면서 제시한 죄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한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둘째, 대한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죄 셋째,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넷째,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다섯째,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여섯째,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일곱째,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여덟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아홉째, 교육을 방해한 죄 열째, 한국인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열 한번째,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버린 죄 열 두번째, 대한국민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열 세번째, 현재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과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처럼 일왕을 속인 죄 열 네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 다섯번째, 일왕의 아버지 태왕을 죽인 죄.

안중근의 의거가 알려지자 조선과 중국의 백성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중국의 국부 쑨원은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빛나리.’라고 극찬했다. 신문화혁명의 선구자인 천두슈는 ‘나는 중국 청년들이 톨스토이와 타고르가 되기보다 콜럼버스와 안중근이 되기를 원한다.’며 경의를 표했다. 당시 일본과 한국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던 양계초는 ‘추풍에 덩굴이 끊어지다.’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뜨거운 찬사를 보낸다.

‘흙모래 대지를 휩쓸고 바람은 노하여 울부짖는데, 칼날 같은 흰 눈이 흑룡강 연안에 쏟아진다. 다섯 발자국 지척에서 피 흘리게 하여 대사를 마쳤으니. 그 웃음소리 저 달보다 높구나, 장하다 그 모습. 해와 달처럼 빛나리.’

상해의 민우일보는 논설을 통해 ‘고려의 원수는 우리의 원수다. 삼한에 사람이 있어 일본이 길게 내뻗는 팔다리를 꺾었다. 비록 한인이 자기의 원수를 갚았다고 하지만 역시 우리의 원수를 갚은 것이 아닌가!’하며 그의 의거를 높이 평가했다. 중국의 지식인 뤄난산은 1914년 중국에서 발행된 박은식의 ‘안중근전’ 서문에서 안중근의 의거가 중국의 신해혁명에 직접적인 여향을 주었다며 고마워했다.

훗날 중국의 총리가 된 주은래는 천진 남개대학 재학 시절 안중근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을 연출했고, 부인 덩잉차오가 남장을 하고 안중근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막부의 오랜 무단정치를 끝내고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으며, 근대국가 일본의 초석을 세운 인물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국권을 침탈하고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국적이다.

그는 요시다 쇼인에게서 정한론을 배웠고, 영국 유학에서 돌아와 메이지유신에 적극 참여하면서 일본의 개혁과 부국강병을 주도했고 네 차례에 걸쳐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다. 평생 조선 병탄을 꿈꾸던 그는 고종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체결,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최초의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는 조선을 자신의 영지처럼 취급하면서 일본화를 위해 온갖 모략과 술수를 자행했다.

그리고 현직에서 물러난 이토는 동양의 이토가 되기 위해 고토 신페이의 ‘동양경영제안’을 받고 조선의 병탄을 국제적으로 승인받기 위해 만주 일대를 순방하다가 하얼빈 역두에서 안중근의 총탄에 죽는다. 그는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조종하고, 1904년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어 조선의 통제와 보호권을 보장받기도 한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지배할 권리를 승인받는 주도면밀함을 보이기도 한다.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대동하여 고종과 대신을 협박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기도 한다. 미국 예일 대학의 레드 박사를 만나서는 ‘당신을 나의 나라 조선에 초대하고 싶다.’는 망언을 늘어놓기도 했다. 이후 조선은 20만권의 책자를 불사르고 10만점의 문화재를 가져간 데라우치 마사다케, 학살자 하세가와 도시미치, 학도병과 징용을 강행한 고이소 구니아키, 역사를 폄하한 오카쿠라 텐신, 창씨개명을 주도한 미나미 지로 등에 의해, 총독의 식민화 정책에 의해 서서히 혼을 잃고 구렁의 나락으로 떨어져간다.

우리의 역사 속에 살아 숨쉬는 애국지사들을 잊지 말고 우리의 역사를 절대 잊지 않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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