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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일흔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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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일흔이면
  • 박관
  • 승인 2023.08.28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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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관∥본지 논설위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로 치자면 인간의 나이 70이면 ‘고희(古稀)’라고 불렸다. “옛날부터 찾아보기 희귀한 일이다”는 말이다. 지금이야 의료기술이 발달해 이가 아프면 뽑아버리고 임플란트 치아로 바꾸어 사용하고, 여러 항생제를 사용해 각종 병세를 치유하면서 수명을 연장해 가지만 그 당시에는 왕인들 아프면 무슨 소용이 있었으랴. 

공자님은 그래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한 말씀을 남기셨다. 나이 일흔이면 ‘종심(從心)’의 단계에 이른다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이나 행동을 자유롭게 해도 법도에 어긋나거나 다른 사람에게 거슬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유난히 나이별 특색을 강조했던 공자님도 자신이 70대까지만 살아서인지 80대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으니 아쉽다.

요즘 인간의 기대 수명은 100세를 훌쩍 넘어 120세를 전망하고 있으니 인간의 진화는 얼마만큼의 속도에서 만족해 브레이크를 잡을 수 있을까? 우리 손주들의 세상에서는 죽기가 정말 어려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간다면 AI의 정확한 진단 아래 의료정보가 잘 입력된 로봇을 통해 정밀한 시술을 받고 그래도 문제가 있으면 망가진 장기를 새로운 인공장기로 교체하면 되기도 한다. 어디 거기에서 끝나는가.

자기 몸에 좋지 않은 유전인자(DNA)를 아예 제거해 버리는 기술까지도 겸비하고자 하는 인간들의 발상이 거의 조물주의 경지에 가까워지고 있음이라. 현재 지구상의 인구가 78억 명 정도 되는데 그중에서 65세까지 생존해 가는 사람이 불과 8%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다. 놀랍기도 하거니와 현대에 와서도 70세까지 살아왔다는 것은 크나 큰 축복임을 느낀다. 

100세가 훌쩍 넘은 우리나라 노(老) 철학 교수의 경험담이 솔깃하게 들려온다. “내가 살아보면서 느껴보니 우리 인생의 황금기는 65세에서 75세 사이더라”라는 견해가 결코 과장이나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고 인생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성찰이라 보이기 때문이다.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의 평균수명이 100세에까지 이른다면 단순 계산으로만 봐도 앞으로 30년을 더 살 수 있다는 결론 아닌가.

30년의 세월을 더 보장받은 일흔의 나이는 바야흐로 새로운 ‘말년 청춘(末年靑春)’의 시작이라 한들 누가 감히 이 말에 토를 달리오. 이 아름다운 청춘을 재발급받은 그대들은 새로운 인생의 풍미를 맛볼 자격이 충분하다. 그 나이임에도 운동을 열심히 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기울이면서, 항상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충만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고통마저도 부담 없이 감내해 가는 마음가짐. 그것이 바로 말년 청춘이 지닌 공통의 생활방식이다. 

‘무조건 먼저 주는 사랑’을 성경에서는 최고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 고귀한 명제를 허식으로 짜집기 하지 않고 온몸으로 느끼면서 음미해 갈 줄 아는 나잇값이 이쯤이나 보다. 젊은 날에 관성적으로 해왔던 ‘주고받는 사랑’은 거래에 불과한지 모른다. 손주들에게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무조건적으로 보여준 관심과 사랑의 모습을 보라. 거기엔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행복이 담겨 있지 않던가? 그것이 바로 자신의 근원적인 사랑의 원천이 아니고 무엇이랴.

70대의 어르신들이여! 아직도 대우받는 어른 노릇을 하려고 수고를 하시는가? 다들 그 무거운 짐을 덜어 놓으시게나. 2진법의 디지털(Digital) 사고에 젖어있는 젊은이와 10진법의 아날로그(Analogue) 세계에 갇혀 있는 그대들의 셈법하고는 아예 차원이 다른바 5배속이나 빠른 속도감과 순발력을 당할 재간은 없다. 그러나 아날로그의 사고(思考) 속에 깃들여 있는 역사성과 인간성 그리고 유일하게 버티고 있는 지구력 또한 버릴 수 없다. 

과학, 기술의 발달과 함께 소멸해 가기 시작한 인간성의 회복을 아날로그 방식으로 풀어줄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다. 권위를 앞세워 단지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인격의 소유자가 아닌 진실로 우리 사회와 인류를 위한 ‘린치핀(Linchpin-마차나 수레바퀴에서 빠지지 않게 중심축을 고정하는 중요한 부품)’의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어른 말이다. 

남의 일만 같았던 ‘죽음’이라는 실제가 나의 몫임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과정이 나이 일흔쯤 이런가. 생과 사의 경계선이 그렇게 큰 차별이 아니라는 것. 정신과 육체가 따로인 것 같지만 결국 하나로 이어지듯이 삶과 죽음 또한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다는 것.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나 있을진대. 이제 과거에 관한 쓸데없는 숙제는 더 짊어질 필요가 없다. 다만 미래에 대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기원할 때다. 거기에다 자신의 영적(靈的)기다림을 살펴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른다면 더는 무엇을 바라리오. 

나이 일흔은 순식간이다. 마치 거센 장맛비가 하천을 밀어내듯이. 잃어버린 청춘을 탄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자세. 이름하여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 또 그저 감사함으로 하루를 채워가는 지혜가 필요한 즈음이다. 이러한 심중이라면 가히 공자님이 말씀하신 종심(從心)의 경지와 다를 바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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