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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아내(3) '밀과 야스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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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아내(3) '밀과 야스퍼스'
  • 강성률
  • 승인 2023.04.19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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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교수의 철학 이야기(95)

공리주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1806년~1873년, 영국)이 스물네 살 되던 해, 런던의 실업가 존 테일러의 초대를 받았다. 이 일이 계기가 돼 그는 테일러 부인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밀보다 한 살 아래인 그녀(헬리어트 테일러)는 이미 남편과 결혼해 슬하에 두 아이를 두고 있었다. 도저히 맺어질 수 없는 사랑인지라, 부인은 마음속으로 밀을 단념하려고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남편(테일러) 역시 아내에게 단념할 것을 설득했고, 밀 또한 부인을 만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 6년 후, 테일러 부인은 남편의 양해를 얻어 두 아들을 데리고 파리로 가서 요양 중이던 밀을 간호했다.

이 사건으로 밀은 많은 친구들과 가족을 잃어야 했다. 이러한 희생을 치른 끝에, 드디어 밀은 부인과 정식으로 결혼을 한다. 테일러는 이미 2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많은 유산이 그녀에게 돌아온 뒤였다. 그러나 결혼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모두 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밀은 아내를 프랑스 남쪽 지방으로 요양을 보내는 한편, 자기는 저술 작업에 몰두했다. 1858년 겨울, 밀 부부는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피한(避寒)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곳에서 헬리어트는 감기에 걸려, 갑자기 죽고 말았다. 밀은 아내의 유해를 묻고, 묘지 가까운 곳에 아담한 집을 사서 이곳에서 지냈다.

헬리어트가 죽은 후, 밀을 돌봐준 사람은 그녀의 장녀인 헬렌 테일러였다. 어머니가 죽은 후로는 자진해 밀의 비서 역할을 담당했다. 어머니와 밀의 진실한 사랑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밀은 헬렌과 함께 아내의 무덤이 있는 프랑스의 아비뇽에 가서 살기도 하고, 런던으로 돌아와 생활하기도 하면서 저술에 힘썼다. 밀은 죽어 아비뇽에 있는 헬리어트의 묘 옆에 나란히 묻혔다.

아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철학자도 있었으니,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1883년~1969년)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그는 동급생인 유태인 학생 에른스트 마이어를 만났고, 4년 연상인 그의 누이와 결혼한다. 그러나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유태인 아내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는 상당한 박해가 가해졌다.

철학과 주임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학교 행정에 관한 모든 권한이 박탈됐다. 1937년 여름학기가 끝나기 직전에 야스퍼스는 휴직을 통보받는데, 이 무렵 독일의 모든 대학에서는 유태인과 결혼한 교수들이 면직됐다. 여기에서 그는 ‘외국으로 망명하든지, 아니면 국내에서 강제이혼을 당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인다.

처음에 이민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야스퍼스는 이혼을 하지 않은 채, 국내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이때부터 죽음을 각오한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의사 친구로부터 청산가리를 얻어 낮에는 선반에, 저녁에는 머리맡에 두었다. 언제 비밀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유언장도 미리 써두었다. 이때 그의 부인은 남편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했다. 전쟁이 끝나고, 야스퍼스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한편, 그의 부인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몸집이 매우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방문객과의 대화에 자꾸 끼어들어 참견을 하고, 이에 남편인 야스퍼스는 꽥 소리를 질렀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부부가 힘을 합쳐 그 난관을 잘 극복하다가도, 일상생활로 돌아가면 하찮은 일로 싸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떻든 아내가 사랑스럽게 생겼는지 아닌지, 그 아내의 성격이 좋다거나 좋지 않다거나 여부를 떠나, 그를 사랑하고 않고는 또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야스퍼스 부부의 경우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광주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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