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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 도생(道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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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 도생(道生)
  • 강성률
  • 승인 2022.08.05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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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교수의 철학 이야기(69)

타고난 품성이 총명했던 도생(道生)은 일곱 살 때에 고승 법태(法汰)를 따라 출가해 열네 살 때에는 강단위에 올라 불법을 강의함으로써 많은 고승 명사들을 변론으로 굴복시켰다.

스승인 법태가 세상을 떠나자 이번에는 여산으로 가서 혜원 대사에게 배웠다. 그러나 여산에서 7년 동안 불학을 연구한 도생은 마침내 불교의 엄격한 계율에 지치고 만다. 

한번은 송나라 무제(군인 출신의 초대 황제, 363년-422년)가 성대한 잔치를 열고 남경(南京)의 모든 승려들을 초청했다. 그런데 정오가 지나서야 식사가 시작됐다. 이때 어느 고승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인도에서 전해져온 규율에 보면, 정오가 지나면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에 많은 승려와 대신들이 젓가락을 놓아버렸다. 잔치를 준비한 송무제가 ‘해가 중천에 떠있으니 정오가 지나지 않았다’고 하며 식사하기를 권했다. 이때 도생이 벌떡 일어나 모두에게 외쳤다.

“태양이 아직도 중천에 있거늘, 누가 정오가 지났다고 말씀하십니까?” 그러고 나서 단숨에 밥을 먹어버렸다. 그러자 모두가 젓가락을 들어 식사함으로써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으로 보인 이 사건으로 인해 도생은 많은 승려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다.

이로부터 2년 후, 도생은 결국 쫓겨나다시피 해 호구산에 이르렀다. 산 위의 암자에 있는 커다란 돌을 향해, 그는 울먹이면서 자신의 입장을 호소했다.

"돌들아! 말해다오. 천제 또한 사람이기에 마땅히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여기에서 말하는 천제(闡提)란 ‘세속적 쾌락만을 추구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비방해 성불의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을 가리킨다. 도생의 감정이 너무 북받친 탓인지 눈물 젖은 눈으로 바라보니, 크고 작은 바위들이 모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도생은 웃으면서 “바윗돌들이 모두 나의 견해에 찬성하니, 나의 말은 증명되었도다.” 라고 말했다. 물론 바윗돌들이 고개를 끄덕였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알 수도 없거니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증명’됐다고까지 말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 후, 인도로부터 전해져온 '대열반경'에는 ‘천제도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분명히 밝혀져 있었다. 도생의 견해를 뒷받침해준 것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예순 살의 그가 여산의 동림사에서 불법을 강의할 때는 온 산이 사람들로 뒤덮이게 됐고, 수많은 고승들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절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어느 겨울, 여전히 도생은 여산의 동림사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열반경의 강해가 막 끝나갈 무렵, 그의 손안에 들려있던 사슴꼬리가 땅에 떨어졌다. 모두들 깜짝 놀라 달려갔을 때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고승이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보통 점오성불론(漸悟成佛論)에 따르면, 주어진 각 단계마다 학습과 실천을 점진적으로 꾸준히 쌓아가야만 비로소 부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도생의 돈오성불론(頓悟成佛論’)에 의하면, 성불이란 멀리 떨어져있는 두 바위 사이를 발딱 뛰어넘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두 바위 사이에는 중간 단계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것을 한꺼번에 뛰어넘지 못하면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 칠 뿐이라는 것이다. 

중국 동진(東晋)의 승려인 도생(372년-434년)에 이르러 중국 위진 시대의 불교는 학문의 최고봉에 도달했으니 그는 나습의 제자이자 혜원의 문하생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스승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인도의 사상을 새롭게 비평하고 불교의 제도를 개혁해 중국식의 불교를 정착하도록 만들었다.

(광주교대 명예교수·철학박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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