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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과 木浦 고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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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과 木浦 고하도
  • 유재길
  • 승인 2017.11.2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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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길∥사단법인 목포시의정동우회 회장

 

목포 고하도는 지금으로부터 420년전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진(鎭)을 설치하고 106일을 머무르며 칠천량 해전으로 함몰된 조선수군을 재건한 유서깊은 지역이다.

당시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山城) 일부가 남아 있고 전선을 건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가 있으며 여기에 군량을 비축한 사적(事蹟)을 기념하는 유허비(遺墟庇)가 보존돼 전라남도 지방유형문화재 39호로 지정됐다.

목포시에서는 충무공께서 고하도에서 이룩하신 일들을 기리기 위해 모충각(慕忠閣)을 짓고 그 안에 비각을 지어 유허비를 보존하고 해마다 4월 28일에는 이충무공 탄신제를 봉행하고 있다.

이순신장군은 판옥선 13척과 초탐선 32척으로 1597년 9월 16일 울돌목에서 일본수군을 크게 무찌르기는 했지만 수적인 열세를 감안해 적과의 접전을 피하며 전라북도 고군산 열도까지 후퇴작전으로 물러났다가 일본군의 추격이 멈추자 뱃머리를 돌려 남쪽으로 내려왔다.

우수영(右水營)이 불타버렸으므로 신안군 발음도(發音島, 일명 안편도)에서 19일간 머무르다가 그 해 10월 29일 고하도(高下島)에 닻을 내리고 수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이곳에서 1597년 10월 29일 ~ 1598년 2월 16일까지 106일을 머무르니 이 때 이곳 고하도진은 임시 수군 통제영이 된 것이다.

이순신장군께서는 1597년 10월 29일 고하도에 도착하자마자 막사를 짓고 대장간을 차려 인근 고을에서 목수와 대장장이를 모집해 도검, 창, 조총을 만들고 전선에 장착할 승자총통 등 각종 총통과 철환을 만들었으며 선소를 차려 전선을 수리하고 건조했다.

염초공을 불러 화약을 굽고 활 만드는 쟁이를 모집해 활과 화살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때 고하도는 병선을 건조하는 조선소요, 무기를 만드는 제조창이요, 군량미를 수집 보관하는 군량 창고요, 군대를 훈련하는 연병장이며, 소금을 굽는 염전이었다.

이렇게 3개월 반 동안에 병사 약 6000여명을 충원하니 고하도에 처음 왔을 때 거느린 2000여명과 합해 그 숫자가 8000여명에 이르게 됐다. 여기서 전선(戰船)을 건조하고 수습(收拾)하니 여기에 올 때 거느린 15척의 전선은 50여척으로 증가됐다.

한편으로는 군량미를 마련하기 위해서 실시한 것이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의 발급인데 이는 좌막(佐幕) 이의온(李宜溫)의 제안을 받아들여 실시한것으로 10여일 만에 1만여석의 식량을 모을 수 있었고 소금을 팔아 식량을 구매하고 일반 백성들과 친지들의 의연곡 답지로 두어달 동안에 군량미 수 만석(약 2만석)을 모을 수 있었다.

이때 이순신장군을 도와 수군을 재건하는데 기여한 공로자는 전라도순찰사 겸 감사 황신(黃愼)을 비롯해 전라도 수군 소속 고을 수령과 각 진의 첨사 및 만호와 연해안 고을 백성 및 경상도 수사와 관할 첨사 및 만호들이었다.

이순신장군께서는 고하도에서 3개월 반 동안 머무르시며, 병사를 모집하고 전선을 건조 수습하며, 군량미를 쌓으니 옛날의 강성하던 수군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일본군과 맞싸워 볼 만한 자신감이 생겼으므로 적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서 건곤일척을 벌릴 때라고 생각하고 1598년 2월 16일 전선을 이끌고 고하도를 출발해 다음날 강진현 고금도 덕동으로 진을 옮겼다.

그리고 이로부터 9개월 후인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고 임진 7년 전쟁의 휘날레를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다. 이러한 힘을 기르고 축적한 곳이 바로 고하도였다. 그러므로 고하도는 절망을 희망으로 전환시킨 섬이요 무너져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킨 호국의 불꽃이 힘차게 타오른 섬이기도 하다.

그래서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연구한 최영섭은 고하도의 공훈을 평해 “민족의 성지”라고 찬양했고, ‘충무공의 생애와 사상’을 쓴 조성도는 고하도를 충무공의 “정곡(情曲)이 서린 땅”이라고 했다.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장군께서 이곳 고하도에서 이룩한 위업과 군량을 쌓은 일들이 구전돼 유달산의 ‘노적봉 전설’을 낳고, 또 ‘목포의 눈물’의 가사가 돼 이난영의 애절한 목소리를 통해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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