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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노양섭·전영례·김미경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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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노양섭·전영례·김미경 선생님!
  • 호남교육신문
  • 승인 2014.03.19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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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카고에서 삼배가 선생님들께 드립니다

노양섭 선생님, 전영례 선생님, 김미경 선생님! 삼배입니다. 지금은 옛 모습이 없지만 알아보시겠어요? 갑작스런 노양섭 선생님의 정년 퇴임 소식에 놀라고, 세 분 선생님께서 그 자리에 함께 하셨다는 소식에 더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시차 계산을 잘 못해 그 순간을 놓치고 제 시간에 전화 드리지 못함이 얼마나 아쉽고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제가 전화를 했을 땐 바로 전에 떠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친구들이 올린 동영상과 사진들을 보니 세월은 흘렀지만 예전의 선생님들의 모습이 그대로 있으셔서 감사했습니다.

사실 세월이 흘러 이젠 정년 퇴임을 하시게 되고, 33년 교직생활을 하셨기에 연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다리를 다쳤지만 교장 선생님이 되어 새로운 학교에 가시게 되었다는 그런 소식을 듣기도 전에 선생님들 모습만을 봐도 눈물이 났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아서 동영상이 다 제대로 재생되지 않고 버퍼링에 멈춰 버리고 또 멈춰 버려 어렵게 보았지만 선생님들께서 한 마디 한 마디 하실 때마다 깊은 감동이었습니다. 늦은 밤 11시였지만 친구들이 올린 동영상을 보며 스승의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미국땅에서 부르는 스승의 노래, 비록 동영상을 보며 혼자서 친구들을 따라 부르는 것이었지만 세 분 선생님께서 눈 앞에 계신 듯 목이 메이기도 했습니다. 노양섭 선생님의 유머에 웃고, 전영례 선생님께서 불편한 다리로 참석하셔서 친구들과 함께하시며 말씀 주실 때 가슴 뭉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세 분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기에 너무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중학교 1학년 때 전영례 선생님께서 토요일 오후의 쉼을 반납하시고 저희들을 가르치시다가 매를 들려주며 자신이 잘못 가르쳤으니 자신의 손을 때리시라던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께서도 대학을 갓 졸업하고 오셨으니 어린 나이였을텐데 선생님은 못난 제자들을 제대로 가르쳐 보겠다고 오히려 매를 저희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지만 어리석고 미련한 저희는 선생님의 연약한 손에 매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제자가 스승에게 매를 들 수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도 안됩니다. 오랫동안 깊은 죄책감에 잊고 싶기도 했었답니다. 왜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매를 들었었는지…. 그런데 오늘 그 못난 제자들이 자랑스럽고 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혼해서 아들이 8살때인가 큰 거짓말을 해서 아빠에게 매를 맞게 되었는데, 잘못 가르친 아빠가 대신 맞겠다고 제가 제 종아리를 30대를 때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 생각이 나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처음으로 아들 앞에서 울었던 것 같아요. 30년이 지났지만, 선생님 그때 정말 죄송했습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신앙 문제로 밤 늦게 학교 후미진 계단에서 이야기하던 일, 선생님께서 옥과중학교로 가실 때 작고 낡은 신약성경을 드리던 일, 다른 학교로 전근 가셨지만 중 3 섬진강 여름 캠프 때 오셔서 저희에게 격려의 말씀하시던 일들이 새롭게 기억납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저희 앞에서 말씀하시던 모습을 찍은 사진을 오래도록 소중히 간직하기도 했었습니다. 대학시절 우산동 문화여중 (문화중학교) 앞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집에 데려가셔서 식사를 함께 하며 자주 연락하라고 했었는데 그것이 20년 전이네요.

또한 김미경 선생님께서 이런 저런 말씀 가운데 33년 교직 생활과 더 이상 연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편지를 받으셨다는 말씀에 웬지 가슴이 짠해졌습니다. 당신이 제자들에게 그렇게 잘 해 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제 30년이란 세월이 흘러 제자들이 ‘늙은 선생들’을 기억하고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것에 대해 ‘대통령 못지 않게 행복하시다’는 말씀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화향천리 인향만리" 라던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눈시울이 붉어졌답니다.

늘 목이 쉬어라 열정으로 소리를 높이셨고, 매 시간마다 일기 검사로 제자들의 피곤한 영혼을 더 피곤하게 하셨던 일들, 때로는 일기장를 다 걷어 가셔서 체크하시고 코멘트를 달아 주시기도 하셨기에 일부러 마음의 고민들을 선생님 보시라고 쓰기도 했었던 일들도 있었답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못하지만 선생님만이라도 사춘기 아이의 고민을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미국에 살다 보니 아이들이 한글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일 성경을 한글 영어 한 장씩 읽는데 가끔 자음접변, 자음동화니 경음화 격음화 등등 당시 선생님이 이야기하시던 것을 아이들에게 다시 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며 선생님이 생각나곤 했었답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통해서 많이 아프셨다는 소식을 나중에 들었었는데 이렇게 다시 그 이야기를 듣게 되니 또 마음이 아프네요. 찾아 뵙지도 못한 제자들이기에, 또한 제자들도 모르는 오랜 시간 참 많이 아프셨을 선생님의 힘겨움과 외로움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희의 영원한 담임이신 노양섭 선생님, 전영례 선생님께서 말씀했듯이 연락 드리지 못하고 찾아 뵙지도 못했지만 선생님께서는 늘 가슴 속 깊은 곳에 멘토요 큰 스승이셨습니다.

산골 오지 깊은 시골의 아이들을 위해서 특별한 가정 방문을 하셨던 거 기억나세요. 저랑 청운이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학교에서 가장 먼 동네인 약천과 제월리를 다니셨잖아요. 새벽밥을 지으시는 어머니들의 수고를 위로하시고, 오히려 고맙고 감사하다고 하셨답니다. 그리고 선생님과 늦은 밤 자전거를 타고서 밤길을 달리던 기억들이 생생합니다.

다른 선생님들이 뭐라 하셔도 아이들을 위해서 이런저런 것들을 시도하시고, 분단학습은 저희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지금도 기억나요. "곧고, 굳고 굵게"라는 급훈은 지금도 잊어지지 않습니다. 

동영상을 보고서 자기 전에 선생님께서 늘 역설하셨던 도산 안창호 선생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답니다. "무실역행", "성실", "거짓말을 하지 말라"던 그 가르침들. 단지 성적만 올리도록 가르친 것이 아니라 큰 꿈을 가지고 민족과 역사에 큰 인물로 자라기를 바라는 선생님의 그 마음을 아이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참교육이 나오기 훨씬전에 이미 참교육의 열정을 온 몸으로 실천하시려 했던 선생님의 작은 가르침들이 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답니다.  그리고 대학시절, 광주에서 동창애들 십여명과 말바우 시장근처에서 만났을 때 "삼배 네가 술을 마시니 기분 좋다"던 거 기억나세요. 사실 저도 너무 좋았습니다.

제가 대학시절 신앙의 방황이 많았을 때라 다행이었지요.시간이 흘러 선생님과 제자들이 한자리에 앉아 옛 이야기로 이야기 꽃을 피우던 때가 참 그립습니다. 지금은 미국 유학 후 시카고에서 목회를 하고 있답니다. 이제 술은 끊은 지 오래 전이라 좀 아쉽기도 하네요.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선생님들께서 함께 계시고 친구들이 있으니 꼭 다시 입면중학교 어느 한 교실 같기도 하고, 웬지 모를 눈물이 나기도 하고, 그 시절의 일들이 하나 둘 지나가며 깊은 그리움에 잠기게 됩니다. 늦은 밤 아이들과 아내에게 선생님들께서 그 시절에 어떤 분들이셨고, 어떻게 우리를 가르치셨으며 사랑하셨는지를 이야기하며 가슴이 벅차 오르면서 감격의 눈물이 나더라고요.

어쩌면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가던 것들이었을 텐데 너무도 생생하게 떠오르며 그리움에 그리고 감사와 감격의 순간들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의 학창시절이 선생님들께서 계셨기에 더욱 아름답고 행복했습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 시카고에서 삼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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