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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세뇌
  • 안용호
  • 승인 2010.02.0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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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호∥前 광주광역시교육청 장학관

정년을 한 뒤 얼마간은 저녁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잠이 쉽게 들지 않아 몸을 뒤척이다가 늦게 잠이 들곤 했다.

'혹시 술을 마시면 잠이 들지 않을까?’ 생각하고 술을 먹어 봤다. 술을 먹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그 다음 날은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왜 이렇게 잠이 안 오지? 어제 무슨 일이 있더니 그것 때문인가?’

결국 또 술을 마시고 잠을 청했다. 결국 나는 술이 없으면 잠을 이룰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다. 이것을 극복하는 데 굉장히 힘든 과정을 겪어야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이중세뇌까지 이르러, 잠이 안 오는 것이 전날 마신 알코올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술을 마시면 잠이 드는 급성 변화에 현혹되어 또 다른 만성 변화를 간과하게 되는 우를 범한 것이었다. 결국 잠이 안 오는 것은 정년으로 인한 스트레스였는데 내가 좋아하는 술 덕분에 잠을 잘 잘 수 있었다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고 술에 더 탐닉했던 것이다.

사실 생리학적으로 볼 때 알코올은 수면을 방해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술을 마시면 자고 싶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잠이 들면 수면의 후반이 방해를 받아 질 높은 수면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어 있다. 우리가 잠이 들면 70분 후에 깊은 잠인 논렘 수면에 들며, 논렘 수면 다음에 오는 얕은 잠인 렘수면이 5회 정도 오는데 알코올이 깊은 잠인 논렘 수면을 방해하여 수면의 후반이 얕아지기 때문에 오히려 빨리 눈이 떠지거나 자고 나서도 찌뿌둥하니 개운치 않다는 것이다.

술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술과 함께 살아왔다. 어렸을 때 할머니께서 할아버지께 드리기 위해 청주를 뜨시고 아버지 드릴 막걸리를 거르시는데 술 맛을 보시기 위해 술 종지로 떠서 맛을 보신 후 일곱 살 먹은 나에게 주면 덜컥덜컥 받아먹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렸을 때부터 술 잘 먹을 소질을 보였던 것이다.

그 후 내가 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교직에 발을 들여 놓고부터였다. 처음에는 어울리면서 같이 먹고, 나중에는 공부 가르치다 피곤해서 먹고, 그 다음에는 술이 좋아서 먹었던 것 같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술을 즐겼다. 술은 세상을 이해하는 길이었다. 좋은 일이나 좋지 않은 일이나 술과 함께 했다. 그리고 손에는 책을 놓지 않았다.

많이 읽었다면 거짓말이다. 술로 해결 못하는 일은 책 속으로 들어가 옛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살았다. 남다른 삶을 살았던 나는 소설의 주인공과 함께 밤샘을 한 적도 많았다. 직장 생활을 빼면 술과 책이었던 것이다. 안 읽더라도 머리맡에 놓고 잠을 잤다.

최근에야 안 일이지만 18세기 문인 남유용이 나처럼 술과 책 두 가지만 좋아하여 다른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인하여 마음의 평화를 잃는 것을 막고자 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구양수가 만권의 책과 천 권의 금석문, 한 장의 거문고, 하나의 바둑판, 한 병의 술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육일거사’라고 한 것을 오히려 괴이하게 여기고 거문고, 바둑판, 금석문을 쏙 빼버리고 술과 책 둘만을 좋아하였다.

남유용은 술이 없으면 세상사가 너무 무미건조하고 책이 없으면 방탕해지기 쉽다는 말로 인생에 이 두 가지는 없을 수 없는 것이라고 옹호하면서 즐겁게 살았다. 여기에 ‘보시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담배에 중독된 자도 식사를 하면 도파민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니코틴의 만성적인 영향으로 뇌의 감수성이 둔해져 있어 니코틴 없이는 도파민이 분비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식사가 끝나면 담배부터 찾게 된다. 담배는 도파민을 강제로 분비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몸과 마음은 니코틴 중독에 빠지게 되고 담배를 끊기가 더욱 어려워진다고 한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뇌 속의 보수계가 자극받아 안식과 평온을 느끼는 도파민이 분비된다. 내가 불면증을 술로 해결하려고 한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의존증’이라는 마음의 함정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에게 신체적 의존과 정신적 의존이라는 ‘이중세뇌’구조가 잠재돼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의존증은 함정이다’는 점을 가슴에 새기고 겸허하게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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