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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정(里仁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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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정(里仁亭)
  • 안용호
  • 승인 2010.07.25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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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호∥前 광주시교육청 장학담당 장학관

광주에서 영광 쪽으로 가다가 삼거동에서 좌회전하여 내려가면 월현이 나오고 조금 지나면 송암 부락이 나오고 모퉁이를 돌면 나산 대정마을 입구에 다다른다. 대정마을 우측 입구에는 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인정’이다. 이 정자는 1694년 죽산안씨들이 최초 마을 뒷 산기슭에 건립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자의 이름은 공자가 말한 ‘인한 마을에 사는 것이 아름답다.’는 이인위미(里仁爲美)라는 구절을 따다 지었다고 한다. 공자는 예를 회복하여 인을 실천하고 대동사회를 이루는 것이 꿈이었다. 이인정에는 이인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리 전통문화의 미풍양속인 ‘인 의 예 지’의 정신이 절절히 배어 있다.

이러한 정신은 이인정에서 해마다 행해지고 있는 풍습에서도 알 수 있는데, 지역 선비들이 마을의 젊은이들을 모아 시와 예를 강론하고 좋은 사업을 권장하며 이웃과 종족간에 화목을 다지기 위해 인(仁)을 가르쳤다고한다. 이인정의 현판은 송시열의 제자중 명필가인 권수암이 썼다고 한다. 글씨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옛 어른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정말 멋진 이름이다. 고개를 드니 조선 효종 때 창평 현감을 지냈던 안여기의 시가 눈에 들어온다.

"강산이 아름답기 남쪽에서 으뜸이라. 삼라만상 그 경치를 어찌 다 거두우리. 수양버들 잎은 지고 성긴 가지 나부껴도. 늦게 핀 연꽃은 바람 일어 향기 그윽 풍겨오네. 천 봉우리 고운 산색 긴 병풍 펼치었고. 한 줄기 맑은 시내 푸른 구슬 흘러 가네. 좋은 모임 오래 오래 노소가 함께 하니. 잔을 들며 서로 즐겨 몇 년 세월 지났는고"

옆을 보니 안여기의 시에 화답하는 대사헌 이언경의 시도 보인다.

"일찍이 좋은 정자 있음을 알았는데. 이제야 이름난 땅 와서 노니네. 연못은 맑아서 거울을 여는 듯. 나무는 늙어서 난간을 누르네. 시골 노인들 잇달아 모여 오고. 들 밖에서 드는 술잔 차례로 권한다네. 취기가 올라오자 자리 옮겨 노니는데. 넘어가는 해 다시 잡아 두었으면"

연못의 물이 수정처럼 맑았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을 감싸 안은 옥녀봉에 한 낭자가 살고 있었는데, 이 연못의 물이 너무 맑아 자기의 옷 매무새를 가다듬을 때는 항상 이 연못을 거울로 삼았다는 것이다. 마침 이곳에 오신 안인수 어른에게서 나산마을의 유래를 들어보았다.

나산마을의 시조이신 충달 할아버지가 극락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나귀를 타고 이곳을 지나시던 남원부사 노극창 어르신이 기골이 장대하고 눈빛이 빛나는 것을 예사롭게 보지 않으시고 집으로 대려다가 공부를 시켜서 장원급제를 하도록 하고 외동딸과 결혼을 시켜서 나산에 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 후 나산은 번창에 번창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다.

때마침 일터에서 돌아오시는 나산 문중의 회장님이신 안영수 어른에게서 사현각의 어른들에 대하여 들어보았다. 사현각은 1908년 안시용이 나산사가 훼철된 후 죽산안씨가문 선조 4명의 위업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고 한다. 안충달은 호는 하곡으로 1525년 생원이 되었고, 153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으로는 강원도사를 비롯하여 병조정랑을 역임하였다.

문장과 효행으로써 널리 알려졌던 어른인데, 어릴 때 극락강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남원부사 노극창의 눈에 들어 그의 사위가 되었다고 한다. 나산사에 배향되었다. 안여해는 호가 리병재로 1682년에 진사가 되고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호남의 유학의 대가를 들라하면 김인후, 기대승, 안방준을 든다. 그러나 학문의 깊이와 넓이가 그분들과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다.

송시열이 귀양 갈 때 완도까지 같이 가면서 시문과 학문을 문의한 동유록이 있고, 최근에는 만덕창수록에 ‘안여해록’이 발굴되었다. 1799년 나산사에 배향되었다. 안여기는 호가 보진당으로 1660년에 진사가 되고, 1669년에 문과에 급제한 분이다. 이후 그는 34세부터 54세까지 성균관 학유, 성균관 학록, 고령현감,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병조좌랑, 선균관 직강 등의 벼슬을 엮임했다. 1799년 나산사에 배향되었다.

안치택은 호가 무은재로 1729년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1739년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이후 이조좌랑, 정언지평, 사간 등의 벼슬을 엮임하였다. 양사 언관으로 활동하였다. 1799년 나산사에 배향되었다. 무은재유고가 발굴되었다. 과거에 합격한 분들이 20여 명에 이른다고 하니 그저 놀랄 뿐이다. 두 분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지금도 나산에는 호남에서 가장 깨끗하고 실력이 있었다는 안석두 교육장을 비롯하여 많은 교육계 인물이 나왔고, 안변균 나산실업 회장도 이 마을 출신이라고 한다. 많은 분야에서 인물이 나왔고,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인정을 보고 있으면 인후한 풍습이 행해지는 마을에서 항상 웃으면서 즐겁게 사시던 어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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