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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쾌
  • 안용호
  • 승인 2011.03.23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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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호∥前 광주시교육청 장학담당 장학관

광고 앞 헌책방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샀다. 우연히 책장의 여러 책에서 주인의 얼굴로 눈길이 머무는 순간 그 주름진 얼굴 위로 조선시대의 책장수, 서쾌 조신선의 모습이 겹쳐졌다. 18세기 정조 시절에 책장수 가운데 누구보다 책을 잘 알고 책을 사랑한 조신선이라는 서쾌가 있었다.

조신선은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서울의 지식 집단에 명성이 자자한 책 거간꾼이었다. 옛날에는 책의 거래를 서쾌가 담당했다. 여러 자료에 자주 등장하는 조신선은 모습도 조금은 특이했던 것 같다. 거대한 체구에 불그스레한 뺨, 짙은 검은 눈동자에 검붉은 수염이 특이했고 모든 행동이 남달랐다. 또 누구도 그가 어디 출신이며 어디 사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이 사는 곳을 비밀에 부쳤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그는 전혀 밥을 먹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밥 먹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 책을 팔아 생긴 돈을 들고 술청을 향해 달려가서 술을 취하도록 마신 뒤 날이 저물어서야 또 어딘가로 달려서 사라졌다. 그는 밥 대신에 술을 먹었다. 그저 술을 거나하게 마시기 위해 책을 팔았다.

책을 팔러 다니는 그 모습이 유별나서 사람들의 눈에 곧잘 띄었다. 동서남북 존비귀천을 가리지 않고 저자거리로, 골목으로, 서당으로, 관청으로 잰걸음으로 달려가서 책을 팔았다. 위로는 벼슬아치부터 아래로는 소학을 읽는,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 모두를 고객으로 삼아 찾아다녔다. 그래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또 조신선은 책을 가슴팍과 소매에 넣고 다니며 팔았다. 마치 요술을 부리듯이 원하는 책을 꺼내 놓았다고 한다. 조신선은 서쾌이기는 했으나 단순한 책장수가 아니었다. 제자백가의 온갖 서적, 그리고 그 목록과 의례를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가 책에 대하여 술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으면 해박하고 고아한 자태를 지닌 군자로 착각할 정도였다고 정약용은 적어 놓았다. 그러니까 책 박사였다. 오늘날 문헌정보학과를 나와 도서관에 취직한 사서와는 아주 다른 전문 사서였다.

조신선은 ‘천하의 책이란 책은 모두 내 책이지요. 책을 아는 천하의 사람 가운데 나보다 나은 사람은 없을게요’ 라며 호언장담했고, 자신감이 넘치는 소리를 했으며, 천하 누구보다도 책을 잘 안다고 자부했다. 책을 이해하는 학자들에게 꿀리지 않고 오히려 자기야말로 책을 천하에서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는 자세는 당당하고 도도하기까지 하다. 그는 중국 유리창에서 수입하는 책 정보 외에도 어느 집에 무슨 책이 있고 누가 무슨 책을 구하려고 하는지를 훤히 알고 있었다.

조신선은 책을 통해 인생과 사회도 읽으려 했다. ‘옛날에는 아무개 할아버지와 아무개 아버지가 책을 사들이더니 귀한 몸이 되고 높은 벼슬아치가 되었지요. 지금 와서는 그 아들과 손자가 책을 팔아먹더니 곤궁해 지더군요.’라고 고백한 대목도 나온다. 그는 이미 책이 권력이며 학문이 출세의 방편임을 세상살이의 틈에서 들여다 본 것이다.

전에 없이 장서가가 많이 출현한 시기가 바로 조신선이 활동하던 시대였다. 책을 모으기도 어렵지만 잘 간수하기는 더 어렵다. 장서를 대대로 지키는 건 그 집안의 위의를 지키는 상징이자 그 집안의 현재와 미래를 점쳐볼 수 있는 징표였다. 이러한 시대에 조신선은 새로운 문화와 커뮤니티를 만들어간 문화적 리더였다. 그는 벽광나치오, 즉 한 가지 일에 미쳐 최고가 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영조시대에 박필순 고변으로 명기집략 사건이 터지고, 서쾌부터 서적을 매매하는 행위를 금지했고, 중국에 사신가는 자에게는 서적을 사오지 말라고 엄명하면서 한성부 마당에서 수 만권의 책을 불태웠지만 책의 유통을 막지는 못했다. 조선 시대처럼 유교적 세계관을 강요하고, 지식의 공급과 유통을 국가가 관장하면서 지식과 정보의 통제를 용이하게 펼쳤던 시대에 떠돌이 장수인 서쾌가 담당했던 일을 훌륭하게 해낸 조신선은 대단한 사람이다.

그래서 만나고 싶다. 오늘 우리는 조신선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날 서치와 서쾌는 아주 드물다. 신분의 제약이 엄격했고, 의식이나 지향이 획일적이며, 모든 것이 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직업까지 제한 받았던 암울한 시대에 조신선처럼 새 분야를 개척해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다는 것은 보통의 용기와 집념으로는 불가능하다.

선생님들 중에 “국어를 나보다 잘 가르치는 사람은 없을게요. 국어를 가르치는 방법은 내가 다 알고 있지요”라고 통 큰 소리를 하는 분이 많이 나오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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