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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현각
  • 안용호
  • 승인 2011.09.2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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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호∥前 광주시교육청 장학담당 장학관

함평으로 가다가 5백년 명문가인 나산 죽산 안씨 동네에 들러 ‘사현각’을 둘러보기로 했다. 마침 마을 입구 이인정에서 문중 일을 의논하시는 안영수회장님과 종손 안당순 어른을 만나 사현각과 나산의 오랜 문화와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우선 이인정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이인정은 누대형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며 건물 내부는 마루로 되어 있는 누정이다. 이인정은 단순한 시정이 아니다. 죽산 안씨들의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시와 예를 강론하고, 양잠 등 좋은 사업을 권장했으며 이웃과 종족 간에 화목을 다지기 위해 인을 근본으로 하여 안씨 문화를 창조한 곳이다.

그래서 정자 이름도 공자가 말한 ‘인한 마을에 사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의 ‘이인위미’라는 구절에서 따다 지었다고 한다. 이는 이인위미의 생각으로 이 마을을 설계한 충달 할아버지의 생각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인정 건물 내부에는 안여기, 안치택, 안치악, 안극로, 안시량의 시가 걸려있어 죽산 안씨들의 문기, 학문적 깊이와 시의 서정성, 서경성을 느끼고 놀라게 된다.

더욱이 대사언 이언경의 시도 걸려 있어 중앙관청과도 밀접한 관계였음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이인정의 현판 글씨는 송시열의 제자 중 명필가인 권수암이 썼다고 하는데 글씨를 보고 있으면 옛날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죽산 안씨들이 인을 실천하며 평화롭고 즐겁게 사는 모습이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야기는 사현각으로 옮겨졌다. 사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와가로 되어있다. 우당 안시용(1858-1925)이 나산사가 훼절된 후 죽산 안씨 가문 선조 안충달, 안여해, 안여기, 안치택 어른들의 위업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고 한다. 사당인 것이다.

안충달은 1534년 중종 때 급제하였고 병조정랑을 역임하였다. 특히 문장이 뛰어나고 효행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고 하며, 올곧은 선비로서 나눔과 배풂 정신에 투철하였고, 성품은 공정하고 인자하였다고 한다. 청렴과 근검 정신이 몸에 배어있었다고 한다. 의로움으로써 자제들을 훈계했으며 간절히 가문의 영광과 발전을 염원했던 분이셨다고 한다.

광주 극락강에서 낚시질하다가 남원부사 노극창의 눈에 들어 그의 세거지인 나산면 송암리로 와서 공부를 했고 1534년에 급제하였다고 한다. 노극창 공의 외동딸과 결혼하였으며, 둘째 아들 사면을 나산 방하동에 저금 내면서 나산 죽산 안씨의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한다.

충달 할아버지는 죽산 안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문장이 뛰어나고 부모에 효도하는 유가적 인간상을 바랐고, 가문이 발전하여 이인위미의 마을이 되는 유가적 이상 세계를 꿈꾸었다고 한다. 여기에 교육관은 위기지학의 자기학습을 통한 내면의 인격완성에 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충달 할아버지의 뜻과 옥녀봉의 정기까지 받은 후손들은 계속 번창했다고 한다.

안여해는 1682년 진사가 되었는데 성리학의 대가로 천재였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동유록과 창수록을 지었는데 전하지 않고 있다. 젊은 나이에 신유학의 영역까지 개척하였으나 일찍 요절하였다고 한다. ‘안씨 문중의 비극이요 나라에 큰 손실이다’고 말씀하신다.

안여기(1637-1694)는 호가 보진당으로 166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고 한다. 34세부터 58세까지 약 25년간 성균관 학유, 고령현감,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병조좌랑, 성균관 직강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안치택(1702-1777)의 호는 무은재다. 173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좌랑을 거쳐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사헌부 장령, 사간원 사간을 역임하는 등 주로 양사의 언관으로 활약하였다고 한다. 품계는 가선 대부에 이르렀다고 한다.

영조대왕이 “나라 일 걱정에 정성을 다하기 위해 세상에 나선 사람 중에 내가 임금으로 임어한지 50년이니 가장 오래 되었고, 치택이 두 번째로 오래된 사람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품성에 꾸밈이 없어 숨지 않고 바른말 했던 사람이다.”고 칭찬한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청렴결백하고 바른 말을 하는 곧은 선비였는가를 알 수 있다. 두 분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사현각에 모셔진 안씨 가문의 4현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다. 조상님의 훌륭한 생각과 의지에 의해 가문이 명문거족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교육관이다. 충달 할아버지는 교육에 남다른 의지를 보이는데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앎을 통한 기쁨을 맛보는 위기지학으로 자기학습을 시켰다는 것이다.

충달 할아버지가 꿈꾼 인을 통한 대동세상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이상향이기도 하다. 그리고 죽산 안씨들의 형제 간, 친족 간에 우애하는 모습과 베풀고 나누는 삶이다. 나산은 훌륭하신 선조들과 그 후손들이 옥녀단장형의 명당에 빚은 남도 최고의 예술품이다. 그리고 이인위미의 유가적 세계관이 나타난 지상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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