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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國人 영웅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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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國人 영웅 안중근
  • 안용호
  • 승인 2011.10.19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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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호∥前 광주시교육청 장학담당 장학관

32세의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순국한 안중근 의사는 우리 민족의 영원한 스승이었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 위대한 영웅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울려 퍼진 3발의 총성은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정의의 의탄이었다.

대한국인 안중근은 본관이 순흥, 고려 말 성리학자 문성공 안향의 26대손으로 황해도 해주부 광석동 수양산 아랫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났을 때 가슴과 배에 일곱 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하여 이름을 응칠이라고 하였으나 자라나서는 중근이라고 불렸으니, 이는 절망하지 말고 행동거지를 무겁게 하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한국 침략을 노골화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905년 을사늑약, 소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케 하고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통감부를 설치, 한국을 완전한 보호국으로 만드는 데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안중근은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항일독립운동에 몸 바칠 것을 다짐하였다.

우선 실력 양성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에 심혈을 기울여 진남포에서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경영하면서 민족의 동량을 양성하는데 앞장섰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고 한채호, 송병운과 함께 3인이 삼합의란 석탄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자본육성에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1907년 정미7조약을 체결케 하여 차관정치를 실시함과 동시에 군대 해산까지 감행하였다. 이를 본 안중근은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국외로 망명, 북간도를 거쳐 연해주에 정착했다. 안중근 장군은 1908년 7월, 의병부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으니 이는 국외에서 국내로 진입한 의병전쟁의 시초였다.

그러나 강력한 일본군의 화력으로 실패하고 천신만고 끝에 연해주로 돌아와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여건은 여의치 못하였다. 이에 그는 1909년 봄, 의병동지 11명과 함께 엔치야 카리에서 왼손 무명지 첫마디를 자른 단지 동맹을 결성, 태극기에 대한독립 4자를 혈서로 쓰고 끝까지 일본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 해 10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곳에서 일본 추밀원 의장인 이토가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토 처단은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에 동지 우덕순, 통역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 적장을 처단하였던 것이다.

일본은 안중근을 살인자로 규정, 관동도독부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중근은, 자신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적장인 이토를 처단한 것이니 국제공법에 의해 전쟁 포로로 재판할 것을 주장하고, 이토의 한국에 대한 죄약 15조목을 논리정연하게 주장하였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어머니가 손수 지어 보내 온 명주 두루마기를 입고 사형대에 올라간 안중근은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안중근은 불과 30년 6개월이란 기간동안 짧았지만 대한독립과 동양평화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살신성인한 애국지사였다. 그는 사형이 확정된 1910년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 자신의 전기인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서문과 전감 일부분을 집필했다.

또한 이 기간에 200여점의 옥중육필을 남겨 안중근은 의사로서, 장군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상가, 서예가로서의 면모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며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사실 독서는 그 자체가 교육이다. 인간은 독서로서 인간다워진다.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는 말을 했는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면서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칠 것을 다짐한 것으로 보인다.

‘크고 긴 탄식하는 소리로 일본의 멸망을 조문한다’ 는 말은 일본이 우리에게 가한 학정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는데 간악한 이토를 죽이는 것만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또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라고 했는데 선비야말로 한국인의 표상이다. 선비들이 의병활동을 한 것을 보면 그 들은 행동으로 모든 것을 실천했다.

‘국가안위노심초사’는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는 뜻이다. ‘백인당 유태화’는 백번 참는 집안에 태평과 화목이 있다는 뜻이다. 애국은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다. 자기를 희생하고 가문까지 희생하고 오직 나라만을 걱정하다 가신 안중근 의사의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을 영원히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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