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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편단심 민들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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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편단심 민들레야
  • 호남교육신문
  • 승인 2024.04.17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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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씨

꽃은 피고 지고 무심한 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다. 대지에 봄의 첫 입김이 서리면서 돌틈 사이에선 노랑 수선화가 살포시 작은 입술을 열었다. 양지바른 골짝에서도 봄을 한껏 머금은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톡톡 터뜨렸다.

4월의 돌담 위에선 흐트러지게 핀 순백의 목련이 베르테르의 슬픔을 잔잔하게 노래하고 있다. 분이네 오막살이에선 올해도 여전히 살구꽃이 대궐만큼 덩그렇게 피었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 매화, 복숭아, 동백꽃도 봄의 잔치에 초대되었다. 그런데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꽃이 어느 틈엔가 살그머니 얼굴을 내밀었다.

어느 들판, 어느 고을을 둘러보아도 지천으로 피어있는 꽃,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면서도 포근한 정을 듬뿍 안겨 주는 꽃, 아스팔트 틈새를 비집고 나와 밟혀도 밟혀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도시의 삭막한 거리마저 아름답게 꾸며 주는 꽃, 하얀 백발로 돌아가면서도 끝내는 자손을 퍼뜨리고야 마는 꽃, 봄의 꽃잔치 무대에 주연으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그런 꽃이 있다, 바로 민들레다. 민들레의 일생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인간의 삶과 맞닿아 있다.

1981년 4월 28일자 경향신문에 ‘햇빛 본 할머니의 꿈’이란 제하의 글이 실렸다.  

“수남(水南)! 이렇게 불러볼 날도 이제 오래지 않겠지요. 어언 접어든 나이가 고희를 넘겼으니 살 날이 얼마나 되리까. 당신을 잃은 지도 30년 성상, 밟혀도 밟혀도 고개를 쳐드는 민들레 같이 살아온 세월, 몇 번씩이나 지치고 힘에 부쳐 쓰러질 듯하면서도 그때마다 당신을 생각하며 이겨 왔습니다.”

글의 주인공 이주현 여사는 50여년 전 당시 동아일보 국장이었던 남편과 결혼했다. 그러나 남편이 한국전쟁 때 납북되는 바람에 홀로 3남매를 키우기 위해 모진 세파와 싸우며 힘들게 살았다. 노점 좌판 등을 하며 어렵게 살아온 이 여사는 평생 모은 돈을 남편이 다닌 동아일보에 기부하여 남편 이름을 붙인 ‘수남 장학금’을 만들었다. 

당시(1981년) 72세의 이 여사는 노구를 무릅쓰고 1년여에 걸쳐 원고 1천여 장 분량의 자전적 이야기 ‘일편단심 민들레야’를 썼다. 그녀는 책의 첫머리에 생사를 알 길 없는 남편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아무리 끈질긴 생명력의 민들레라 해도 일편단심 붉은 정열이 내게 없었다면 어린 자식들을 못 키웠을 것이고, 지아비에 대한 깊은 그리움의 정이 없었다면 붓대를 들 용기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1981년 서울, 한 가수가 좋은 가사를 찾던 중 우연히 누군가의 자서전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자서전은 당시 70대 할머니가 쓴 것으로 53년 전 이별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그 가수는, 지금은 국민가수이자 가왕으로 추대받고 있지만 당시엔 무명의 시절을 보내고 있던 조용필이었다. 조용필은 ‘일편단심 민들레야’의 주인공 이주현 여사에게 자신의 사연을 가사로 만들 것을 제안했고, 그렇게 해서 조용필이 작곡한 유일한 트로트 곡인 ‘일편단심 민들레야’가 탄생하게 되었다. 

님 주신 밤에 씨 뿌렸네 / 사랑의 물로 꽃을 피웠네

처음 만나 맺은 마음 / 일편단심 민들레야
그 여름 어인 광풍 / 그 여름 어인 광풍 / 낙엽 지듯 가시었나
행복했던 장미 인생 / 비바람에 꺾이니 / 나는 한 떨기 슬픈 민들레야
긴 세월 하루같이 하늘만 쳐다보니 / 그이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을까
일편단심 민들레는 일편단심 민들레는 / 떠나지 않으리라> 

가사 중 ‘그 여름 어인 광풍'은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을, ‘낙엽 지듯 가시었나'는 그해 가을 납북된 남편을 가리킨다. ‘하늘만 쳐다보니’는 천국에 간 남편을 그리워함이고, ‘그이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을까’는 남편이 떠나면서 “걱정하지 마, 잘 다녀올게” 라고 했던 그 목소리를 뜻한다.

민들레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아홉가지 덕목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 서당에서는 뜰에 민들레를 심어 학동들이 매일 같이 보면서 민들레의 아홉가지 덕목을 교훈으로 삼도록 가르쳤다. 이를 포공구덕(蒲公九德)이라고 하는데, 인(忍),강(剛),예(禮),용(用),정(情),자(慈),효(孝),인(仁),용(勇)이 그것이다.

민들레는 밟거나 우마차가 지나가도 죽지 않고 살아나는 끈질긴 생명력이 있으니 인(忍)의 덕목을 지녔고, 뿌리를 자르거나 캐내어 며칠을 말려도 싹이 돋고 호미로 난도질을 해도 가느다란 뿌리를 내려 굳건히 살아나니 강(剛)의 덕목을 지녔으며, 돋아난 잎의 수 만큼 꽃대가 올라와 먼저 핀 꽃이 지고 난 뒤 다음 꽃대가 꽃을 피우니 올라오는 순서를 알고 차례를 지켜 피어 예(禮)의 덕목을 지녔다.

여린 잎이나 뿌리를 먹을 수 있도록 온몸을 다 바친 유용한 쓰임새가 있으니 용(用)의 덕목을 지녔고, 봄에 가장 먼저 피며 꽃에는 꿀이 많아 벌과 나비를 불러오니 정(情)의 덕목을 지녔으며, 잎과 줄기를 자르면 흰 액이 흘러나와 상처를 낫게 하는 약이 되니 이는 자비를 뜻하는 자(慈)의 덕목을 지녔다.

약재로서 뿌리를 달여 부모님께 드리면 흰 머리가 검게 염색되어 젊게 하니 효(孝)의 덕목을 지녔고, 모든 종기에 아주 유용한 즙을 내어 사용할 수 있으니 이는 남을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인(仁)의 덕목을 지녔으며, 꽃이 피고 질 때 씨앗은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 돌밭 가시밭 옥토 가리지 않고 떨어져 스스로 번식하고 융성하니 자수성가를 뜻하는 용(勇)의 덕목을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들레가 사랑받는 가장 소중한 덕목은 일편단심(一片丹心)이리라. 큰 뿌리 하나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어떠한 광풍에도 쓰러지지 않으니 그 붉은 정열이 없었다면 홀로 ‘그 여름 어인 광풍에’ 어린 3남매를 어떻게 키워 낼 수 있었을까.

2024년 4월, 지금은 113세가 되었을 그 슬픈 ‘민들레’가 하늘나라에서 ‘그이의 목소리’와 해후하여 생전에 못다한 사랑을 아름답게 꽃피우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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