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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중식 교장선생님 귀천을 애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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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중식 교장선생님 귀천을 애도하며 
  • 이기홍
  • 승인 2023.10.23 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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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前 목포교육장

며칠 전, 모임 나갔던 아내로부터 내가 4년 동안 교감으로 모셨던 국중식 교장선생님이 귀천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가슴이 먹먹했다. 오래도록 근황을 모르다가 너무 빠른 귀천 소식과 마주하니 말문이 막히고 순간 온몸이 움츠려들었다. 

국중식 교장선생님과의 처음 만남은 1990학년도 3월이었다. 광주교대 목포 부설초등학교에서 교감과 교사로 만난 것이다. 알맞은 키에 다듬어진 몸매, 그리고 큰 눈에 어울리는 엷은 미소로 정다운 이웃집 형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첫인상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부설에서의 4년 동안은 내 교직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던 기간이었고 더할 나위 없이 보람 있는 하루하루였다. 교육의 본질 추구에 도전하면서 기가 막히도록 영특한 아이들과 하루해가 짧았기에 그 4년 동안은 내 교직 인생의 클라이맥스였다. 나는 그 기간을 국중식 교감선생님과 함께 했다.

업무는 말할 것도 없고 매주하는 축구, 주말이면 취미로 두는 바둑까지, 국중식 교감선생님과 많은 것을 함께 했다. 당시 부설은 동료 간에 교감 자격 취득 지명을 놓고 매일매일 한판 승부를 벌리는 치열한 격전장이었다. 나는 광주교대를 나온 까닭에 목포교대 출신의 성소나 다름없는 부설에서 그들과 경쟁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나 역시 그들을 물리칠 용기도 능력도 부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몫을 탐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를 집중적으로 공격했고 나는 결코 그 공격을 피해 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 갈등은 심해졌고 상처는 깊어갔다. 그때 국중식 교감선생님은 알맞은 거리에서 절묘한 컨트롤로 갈등을 누그러뜨렸고 상처를 어루만졌다.

나는 첫해와 두 번째 해에 4학년을 담임했고, 세 번째 되던 해에는 6학년을 담임했다. 그리고 네 번째 되던 해도 동료들이 기피하는 학년을 희망했다. 그런데 나는 초등학교에서 가장 선호한다는 2학년을 맡게 됐다. 너무 어려 두렵기도 했고, 갈등이 심한데 동료들에게 시샘을 받고 싶지 않아 기피하는 학년을 희망했는데 국중식 교감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이 그렇게 결정한 것이었다.

내 교직 처음으로 2학년을 맡으면서 기막힌 초등교육의 맛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나의 바람을 스폰지처럼 빨아들이는 2학년은 정말이지 다른 학년에 비해 교육의 맛이 진하게 느껴졌고 그 경이로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부설은 교사 개개인 별로 연구 교과를 담당해 근무를 했다. 나는 도덕과를 담당했는데 반드시 연구 교과에 대해서는 동료 교사나 교생을 상대로 시범 수업을 해야 했다. 그런데 당시 목포부설에서는 2학기 동안에는 연구 교과가 아닌 다른 교과로 하는 연구수업을 추진했다. 평소 집중적으로 나를 공격하는 것에 대비해 수학과 수업을 공개하기 위해 생존 차원에서 수학과를 연구했고 그 연구에 힘입어 수업을 공개했다.

그런데 그 해 학년말 오영대 씨가 민선 초대 전남교육감이 되면서 전국 최초로 평교사에서 장학사 채용 공개 전형을 실시했다. 그 전형에서 교육학, 일반상식, 그리고 수학과와 과학과 수업 안 쓰기가 나오고 말았는데, 나는 생존 차원에서 공부한 2학년 수학과 수업 안을 썼고, 공개전형에 합격해 최초로 평교사 출신 장학사가 됐다. 그 시작의 중심부에 국중식 교감선생님이 있었던 것이다. 

부설은 항시 업무에 쫓기었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온갖 과제들로 여유가 없는 학교였지만 국중식 교감선생님은 어느 경우에도 얼굴에 쫓기는 내색을 하지 않았고,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국중식 교감선생님은 그의 예술적인 글씨체처럼 삶에 항상 여유가 있었으며 대화에 유머가 풍부했다.

감동적인 애국 훈화, 모질지 않는 언어습관, 삶터를 훈훈하게 만드는 배려, 바람 같으면서도 항상 느껴지는 무게감, 대강 이런 것들이 당시 국중식 교감선생님을 대변하는 말이다. 교감으로 모신 이후에도 교직을 마칠 때까지 전문직으로 또 학교장으로 인연을 맺고 서로 의지하며 교직을 수행했다. 국중식 교장선생님은 사고가 항시 유연하고 수하인 나보다는 새로움에서 앞서갔다.

두 아들의 이름인 국경일, 국민상에서 알 수 있듯이 참신한 사고의 소유지였다. 누구와도 항시 잘 어울렸고 특히 손아래 사람이나 하급자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정말이지 폭이 넓은 사람이었다. 실무자일 때보다는 지도자일 때 더욱 그 능력이 발휘되는 분이셨다. 

국중식 교장선생님이 떠나시고 나니 더더욱 함께했던 지난날이 그립고 소중하게 생각된다. 부디 먼저 가신 사모님과 저세상에서나마 못다한 부부의 정을 다시 나누시길 빈다. 국중식 교장선생님이 떠나간 자리가 오래도록 남을 것만 같다. 부설이 자리한 송림동산에 은은한 별 하나 스러지니 적막감 속에 어둠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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