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야, 참 알이 굵기도 하다!
상태바
야, 참 알이 굵기도 하다!
  • 이기홍
  • 승인 2023.07.03 09: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기홍∥전 목포교육장

용인에 사는 딸에게 자두를 보냈다. 아시내 우리 집 현관 앞에 있는 자두나무는 내가 오얏 이(李) 자를 쓰는 전주 이가인지라 심은 것인데 해마다 적지 않은 자두가 열려 6월 초면 따서 아들과 딸에게 보내고 있다.

올해도 아들과 딸에게 보낼 요량이었는데 작년 겨울 무척 추웠는지 많이 열리지 않았고, 또 가뭄으로 크질 않아 어린 아들을 키우고 있는 딸에게만 보낸 것이다. 딸이 특별히 자두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들이 이사를 가기 위해 집을 정리하는 중이라 자두가 짐이 될까 봐 이기도 했다.

딸에게 자두를 보내면서 자두 알 하나하나를 꼼꼼히 확인했다. 혹 벌레는 먹지 않았는지, 모양이 곱지 않고 빗뚫어졌는지, 크기가 너무 작지는 않는지, 그렇게 고르다 보니 보낼 수 있는 것은 작은 스티로폼 상자로 하나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딸과 사위가 받아보고 분명 고향 집 자두나무는 다른 집과 달라 잘 생기고 튼실한 자두만 열리는 줄로 알 것만 같다. 

불현듯 내가 교직 시절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동시가 생각났다. ‘할머니가 보내셨구나 이 많은 감자를. 야, 참 알이 굵기도 하다. 아버지 주먹만이나 하구나. 올 같은 가물에 어쩌면 이런 감자가 됐을까.’

나는 그때 할머니가 잡수시기 위해 남겨둔 감자는 분명 작고 못생겼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과학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심은 감자가 가물에 한결같이 알이 굵을 수는 없음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그 감자에 묻어나는 손주 사랑을 이야기했다. 화롯불에 감자를 구우면 할머니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대목에서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손주의 마음이 잘 나타났다고 영혼 없이 가르쳤다.

그러자 아이들은 눈망울을 깜박이며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나를 도리어 가르치기도 했다. 작가 장만영이 이 시를 발표했던 때가 1949년이니 가난했던 시절의 분위기를 우울하지 않게 재미있는 운율에 맞춰 표현해 많은 공감을 얻어 교과서에 실렸을 것이리라. 

나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농작물로 돈을 사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돈이 나올 곳이 없었다. 그래 우리들 학자금인 돈을 사기 위해 잘 팔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농작물을 다 내다 팔아야 했다. 그러다 보면 남은 것은 찌끄러기였다. 볼품없고 상처 나고 벌레 먹은 그 찌끄러기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식생활을 했다.

얼마나 많은 찌끄러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잡수시는지 모른 체하며 우리는 그 시절을 넘겼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세월에게 겹쳐 가라고 당부했다. 쌀 대신 보리쌀을, 반질반질한 것 대신 벌레 먹은 것을, 신선한 것 대신 오래된 것을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릴 위해 잡수신 것이다. 이제 나는 딸에게 좋은 것만 보내고 굵지도 않고 미끈하게 자라지 못한 자두를 부모님 생각을 하며 먹는다. 

오늘은 성기동에 잠들어 계신 부모님을 딸도 모르게 감춰둔 올해 나온 자두 중 가장 좋은 것 몇 알을 들고 찾아뵈었다. 얼마 전에 묘역을 예초기로 다듬어 놨는데 풀이 벌써 많이 자랐다. 내가 심은 묘역 옥향 나무가 모양을 갖춰가니 주변의 아름드리 소나무와 어울려 나름대로 멋있다. 왕인박사 유적지 근처라 오가는 사람들로 인기척이 항상 느껴지는 곳이지만 항상 조용하고 아늑하다.

그래 나는 성기동 부모님 묘역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합니다. 지난날 당신의 희생으로 아들이 오늘을 삽니다. 굵고 좋은 고구마는 절간고구마로 내다 파시고 남은 쥐꼬리 고구마로 주린 배를 채우시던 당신의 희생으로 오늘 이 아들이 살고 있습니다. 나는 잘 생긴 자두를 유택 앞 상에 놓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성기동을 떠나왔다.

아직 돌도 안 돌아온 외손자 영민이를 키우느라 힘든 딸이 친정집 자두가 올해는 참 잘 여물었다고 생각하며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 더하여 딸도 어린 시절 맡았던 달 떠오르는 월출산의 산 냄새가 밴 아시내 냄새를 자두 속에서 맡았으면 좋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