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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권력(6) 조광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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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권력(6) 조광조(1)
  • 강성률
  • 승인 2023.01.24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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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교수의 철학 이야기(86)

인의에 바탕을 둔 도덕정치를 꿈꾸다가 꺾인 사상가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조선 중종 때의 유학자 정암(靜庵) 조광조(1482년-1519년)이다.

조광조는 한양의 관료집안 출신으로 그의 부친 조원강은 사헌부 감찰을 지낸 사람이었다. 이렇듯 고급 관료를 많이 배출한 집안에서 그는 일찍부터 유학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열일곱 살 때 어천(지금의 평북 영천)으로 가 당시 사림파(士林派:김종직, 김숙자, 김굉필 등 영남 사람을 중심으로 이뤄진 파. 훈구파와 대립함) 학자로 이름을 떨치던 김굉필(벼슬이 형조좌랑에 이르렀음)의 제자가 됐고, 이미 젊은 나이에 장래가 촉망받는 학자로 손꼽히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년에 그 유명한 갑자사화가 일어난다.

주지하다시피, 갑자사화란 연산군이 주도한 훈구사림파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 사건을 가리킨다. 성종의 첫 번째 왕비 한씨(韓氏)가 19세의 나이로 자녀 없이 사망하자, 성종은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맞아들인다. 왕비가 된지 4개월 만에 연산군을 낳은 윤씨는 심한 질투심으로 인해 여러 사건을 일으키다 임금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돼 폐서인(廢庶人)돼 궁궐에서 사가(私家)로 쫓겨난다.

이후 연산군의 세자책봉이 거론되는 시점에 이르자, 성종은 후환을 염려해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린다.  그러나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이 사실을 임사홍의 밀고로 알게 되었고, 이때부터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 벌어지게 됐다.

연산군은 윤씨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들을 궁중 뜰에서 때려죽이고, 그들의 아들들 역시 귀양을 보낸 뒤 사사(賜死:극형에 처할 죄인을 대우한다 해서 임금이 독약을 내려 자결하게 한 일)했다. 또한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왕비로 추숭(追崇)하고, 성종의 묘에 배사했다. 물론 이 일에 반대하던 권달수는 죽이고, 이행은 귀양을 보냈다.

연산군의 악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윤씨 사건 당시 이를 주장한 사람이나 방관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찾아내 죄를 묻게 했다. 그 결과, 윤필상, 이극균, 김굉필 등 10여 인이 사형됐다. 이미 죽은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剖棺斬屍)에 처해졌다.

이 밖에도 많은 신진사류들이 삭탈관직 당하거나 참혹한 화를 입었다. 이 일 후에 조광조는 스승 김굉필을 대신해 후배들을 가르치는데 평생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이 사화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성종 때 양성된 많은 사림이 수난을 당해 유교적 왕도정치가 침체되고 학계가 위축됐다는 점이다.

또 연산군의 폭정과 만행은 성균관과 사원(寺院)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훈민정음의 교습 및 사용을 금지하는 한편, 한글 서적을 모아 불사르는 등 문화의 정체와 인륜질서의 파괴를 몰아왔다. 이에 1506년 박원종 등 훈구대신(勳舊大臣:대대로 큰 공이 있는 집안의 큰 신하)들은 폭군 연산군을 몰아내고 그의 이복동생을 국왕으로 봉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중종반정(中宗反正)’이다. 이 일로 윤씨는 다시 폐비로 강등됐다. 

이후 조정에서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의 학자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이때 조광조는 진사회시에 장원급제하고 알성시(謁聖試:조선조 때 임금이 문묘에 참배한 뒤, 성균관에서 보이던 과거시험. 일정한 합격정원은 없었음)에도 급제해 조정의 주목을 받았다.

[광주교대 명예교수, 철학박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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