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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많은 세상, 쪽팔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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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많은 세상, 쪽팔린 세상
  • 나동주
  • 승인 2022.05.2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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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동주∥전 영광교육장

지난 2001년에 개봉한 곽경택 감독의 자서전(自敍傳)적인 영화 '친구'는 준석(유오성 분)과 동수(장동건 분) 그리고 상택과 중호의 우정을 비극적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112일 동안 개봉관에서 상영돼 서울 266만 명, 전국 8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당시 한국 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운 화제작이었습니다.

조폭 두목의 아들인 준석과 장의사의 아들 동수 그리고 학업 성적 전교 1, 2위를 다투었던 모범생 상택, 분위기 메이커였던 중호 등 전혀 다른 캐릭터의 친구 4인방이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이들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안타까운 모습을 스펙터클(spectacle)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폭력으로 얼룩진 이들의 빗나간 우정은 결국 살인으로 이어지는 최악의 상황에 봉착합니다. 벨기에 출신 작곡가 뤽 베위르(Lue Baiwir)의 제네시스(Genesis)가 배경 음악으로 깔리는 가운데 동수가 처참하게 살해되는 장면은 아이로니컬(ironical)하게도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평가됩니다. ‘어둠은 빛을 낳고’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이 음악은 죽음의 그림자가 난무(亂舞)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가장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니 세상사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옛 친구인 동수를 살인교사(殺人敎唆)한 혐의를 받는 준석은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기만 하면 무혐의로 풀려나도록 그들 나름의 각본이 완벽하게 짜여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법정에 선 준석은 자신의 범행을 스스로 시인하고 맙니다. 나중에 상택이 준석이게 묻습니다. “너 와 그랬노?” 준석이 답합니다. “쪽팔려서…….” 

‘쪽팔리다’의 사전적 의미는 ‘부끄러워서 체면이 깎인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본래 부끄럽거나, 체면 깎이는 것보다는 남들 앞에서 돋보이려는 경향이 당연한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작동합니다. 그러기에 돋보이려는 마음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며, 결코 탓할 일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처럼 범인(凡人)들의 일상과 달리 오래 전부터 영적(靈的)인 삶을 살아왔던 그녀가 허위학력과 가짜경력 등 수많은 비리에 연루되었을 때 스스로 “돋보이고 싶었다”라고 자백했습니다. 쪽팔리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돋보이고 싶은 마음에 비리가 개입되면 범죄가 되고, 그 범죄는 당연히 상응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녀의 그 무소불위(無所不爲)적 영적인 삶은 처벌은커녕 급기야 소위 ‘퍼스트 레이디(First Lady)’로 등극했으니 서슬 퍼런 절대 권력 앞에서 감히 누가, 누구를 단죄한단 말입니까? 참으로 쪽팔리는 세상입니다.

'돋보이고 싶다’는 ‘쪽팔리지 않고 싶다’와 그 맥을 같이 합니다. 결국 그녀는 쪽팔리지 않기 위해 이름도, 얼굴도, 삶의 궤적까지도 송두리째 표백하고, 세탁함으로써 자신을 돋보이게 만드는 일생일대의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끕니다. ‘정직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지배하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욕망에 지배당한다’는 탈무드의 명언이 큰울림의 여운을 남깁니다. 결국 야누스(Janus)의 얼굴로 진화한 그녀는 ‘나’ 아닌 ‘다른 나’가 ‘나’를 대신하는 우여곡절 끝에 이제 ‘다른 나’가 ‘내’가 되는 아리송한 삶이 그녀의 두터운 가면(假面) 속의 삶이 되었습니다. 여자의 변신(變身)은 무죄이나 변장(變裝)은 유죄입니다.

재임 5년 동안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한 전임 문재인 대통령은 경남 양산의 평산마을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2008년 퇴임 후 김해 봉화마을로 간 전임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조선 시대에 벼슬을 마친 선비들이 낙향하여 조용히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 지극히 선비다운 소박한 삶을 그도 닮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을에 난데없이 일부 보수단체가 난입하여 새벽 1시부터 밤새도록 확성기를 통해 국민교육헌장을 내보는 등 참으로 저질스런 집회로 평화롭던 평산마을이 크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퇴임한 대통령의 사저까지 쳐들어가 정당한 요구 사항도 없이 오직 괴롭히려는 야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극악무도한 행태의 린치(lynch)를 가하는 그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입니까? 

더 가관(可觀)인 것은 이를 단속해야 할 관계 당국에서는 이 단체가 켠 확성기 소리가 집시법 시행령이 정한 심야 소음 기준 55db을 초과하지 않아 제지할 법적 근거가 없다며 방관하고 있다는 기막힌 사실입니다. 아! 이 한 많은 세상에서 쪽팔리지 않으려니 더 쪽팔립니다.

이런 비상식적이고 탈인간적(脫人間的)인 세력이 현 정부 탄생의 뿌리가 되었다니 다시금 온몸에 탱자나무 가시보다 더한 소름이 돋습니다. 그들은 이제 인과응보의 합당한 대가(代價)를 반드시 감내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과 비참함이 응축된 뭉크(Edvard Munch)의 '절규'처럼 몰지각한 집단의 비극적 종말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 다만 그것이 궁금할 뿐입니다.

그래도 정의는 살아 있다는 희망, 언젠가 불의는 온전히 도태될 것이라는 기대,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믿음, 언론 신뢰도 꼴찌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확신 등. 이 절박한 바람이 부디 망상적 착시현상으로써 ‘오아시스콤플렉스’가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5월의 훈풍이 차갑습니다. 쪽팔린 세상에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더운 여름이 올 것 같습니다. 스페인 출신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Juan Ramón Jiménez)의 시어(詩語)처럼 2022년의 봄,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기어이 신작로(新作路) 대신 에움길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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