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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어요, 그땐 몰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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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어요, 그땐 몰랐지만"
  • 나동주
  • 승인 2022.01.07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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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동주∥ 전 영광교육장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경제적 공진화를 위한 모임)로부터 모두 4천 만 원을 받았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중략)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하략)” <노회찬이 소속 당에 보낸 유서 중 일부>

국회의원 노회찬(魯會燦)은 2018년 7월 23일,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나이 62세였습니다. 아무리 청탁도, 대가도 없이 받았다지만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거우니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며 정치자금 4천 만 원에 기어이 목숨을 내놓고 말았습니다. 유난히도 청빈했던 그의 삶에 조그마한 흠결조차 용납하지 않았던 그는 추상(秋霜)같은 민심을 두려워했던 절개(節介) 넘치는 청백리였습니다.

생전에 노회찬은 민의의 대변자로서 의정활동에 최선을 다하는 유능하고 믿음직스러운 우리의 자랑스러운 지도자였습니다. 평소 촌철살인(寸鐵殺人)으로 국민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곤 했던 그가 무소불위의 사법 권력에 항의하며 “대한민국 법정에서 만인(萬人)이 평등합니까? 만 명(萬 名)에게만 평등합니까?”라고 일갈(一喝)합니다. 돌이켜보면 오늘의 정치상황을 예견한 명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검무죄 무검유죄(有檢無罪  無檢有罪)’가 회자되며 버젓이 선택적 정의가 암암리(暗暗裡)에 악의 축을 형성하고, 그에 따른 선택적 기소가 만연한 부조리한 검찰 권력이 국민들의 준엄한 명령에 따라 최근 들추고 싶지 않은 그 가식(假飾)의 휘장을 일부분 거둬내고 있어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노회찬의 소망처럼 당연히 법은 추호(秋毫)의 어김도 없이 만인에게 평등해야 합니다.

노회찬은 또한 일부에서 당시 수감 중이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치소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권침해를 당했다고 주장하자, 짧지만 강력한 퍼포먼스로 그들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국정감사장에서 일반 수용자들의 가용(可用) 면적이라며 신문지 2장 반(1.06㎡)을 깔고 그 위에 누우며 말합니다. 

“제가 한번 누워보겠습니다. 여기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인권침해라고 제소해야 할 사람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니라 4만 여 명의 일반 수용자입니다.” 

참으로 명쾌하고 감동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때 우리는 이처럼 훌륭한 정치 지도자를 배출한 행복한 국민이었습니다. 그는 집이 없어서 청약통장을 못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집이 없어서 청약통장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손바닥에 ‘王’자를 새기며 자신이 왕이 되고자하기는커녕 오롯이 국민을 왕으로 모시고 싶어 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무섭습니까?”라고 국민들을 겁박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국민을 섬기는 종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개에게 준 조롱의 사과가 아니라, 남편에게 사랑 고백이나 하는 희대(稀代)의 막장 코미디 사과가 아니라 거룩한 죽음으로 엄중하게 사과를 대신했습니다.

그는 한결같이 민심을 천심(天心)이라 여겼으며, 자신보다는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모범 정치인이었습니다. 늘 소수(少數)의 편이었고, 약자와 함께 했습니다. 언제나 그의 자리는 낮은 곳, 어두운 곳, 추운 곳이었습니다.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했으나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사람이었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로널드 드워킨(Ronald Myles Dworkin)은 그의 저서 <민주주의는 가능한가>에서 “토론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대의민주주의(代議民主主義)의 근간이 되는 토론을 정치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별의별 이유를 들이대며 한사코 토론하기를 기피하는 작금의 부끄러운 대선 정국에서 언제, 어떤 내용으로든 정제된 언행의 품격으로 다감(多感)하게 토론을 주도했던 참된 민주시민 노회찬을 추억합니다. 그는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권력의 수장으로 살아오면서 이제는 대권의 야욕까지 품는 사람과는 추구하는 가치관과 지향하는 신념의 결이 전혀 다른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미국 제26대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는 “정의란 옳고 그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킴으로써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찾아 그름에 맞서 이를 수호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다.”라고 설파했습니다. 옳음을 쟁취하기 위해 그름과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노회찬이 바라는 세상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살맛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의가 정의를 희롱하는 암울한 최근의 정치현실은 바닷물을 마신 것처럼 자꾸만 우리를 목마르게 합니다. 유권자의 표심을 공략한다면서 몰상식적이며, 비인간적으로 자행되는 거친 네거티브(negative)가 외려 1일 1망언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악순환 속에서 정의는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들어 보입니다. 소위 ‘무식한 삼류 바보들’이 보기에는 그들이 부르짖는 정의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정의답지 못한 정의를 정의라 우기는 그들이 참으로 ‘같잖기만’ 합니다.

대선을 앞둔 우리나라 정치가 국민들에게 부푼 희망을 주기보다는 실망과 노여움만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의 후진성은 국민들의 삶을 건조하고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여의도의 젠틀맨(gentleman)’ 노회찬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설상(雪上)에 동백물 붉게 떨어지고, 그 위에 삭풍 한 줌 얹어지면 그의 빈자리가 아스라이 펼쳐집니다. 정녕 ‘안녕’이라고 말했던가? 결국 기어이 고백하고 말았습니다.

‘노회찬의원님! 사랑했어요. 그땐 몰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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