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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정치 '별도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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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정치 '별도 웁니다'
  • 나동주
  • 승인 2021.12.0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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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동주∥전 영광교육장

소설가 노원상은 그의 장편소설 '배신'에서 조선의 제10대 임금 연산군을 중심으로한 조선시대 정치 상황을 격정적인 지성과 감성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작가는 시종일관 배신의 정치가 낳은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참사를 냉철한 시각으로 목도하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연산군은 과연 폭군이었을까?”
“연산군 이후 조선은 어찌하여 국운이 쇠락해졌을까?”
“야만인으로 무시했던 일본이 어떤 힘으로 조선의 몰락을 가져왔을까?”

이 소설은 연산군 이후 서서히 국력이 쇠약해져가는 조선을 때로는 비감스럽게, 한편으로는 안타까움과 울분으로 아프게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13년이란 긴 세월을 세자로 살아야만 했던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병폐를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당시 성종의 통치 방식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다툼을 권력 분산 등을 통해 적절히 조정해 가면서 수많은 후궁과 술과 책을 벗 삼아 인생을 즐기는 것이었으니, 강력한 왕권주의를 표방하는 연산군으로서는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산군의 눈에는 그것이 나라가 망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나브로 그것이 불행이 시작이었고, 끝이었습니다.

결국 연산군은 권력 다툼에 패하여 배신한 신하들에 의해 쫓겨나는 조선 최초의 비운의 왕이 되고 맙니다. 그럼에도 그를 모시던 영의정은 공신이 되었고, 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던 도승지 또한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아울러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자신들의 반역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야사(野史)’라는 이름을 빌어 연산군을 가장 몰인간적인 폭군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배신이 배신을 낳고, 그 배신마저 철저하게 미화되는 권력의 추잡한 속성이 버젓이 고개를 들고 활보하는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승자(勝者)에 의해 역사는 각색이 되고, 팩트(fact)가 픽션(fiction)으로 둔갑하는 기막힌 세상이었습니다.

정의가 사라지고 배신만이 난무하는 그런 세상에서 백성은 배가 고팠고, 나라는 날로 기울어갔습니다. 왕과 신하는 불통이었고, 입은 있으나 말하지 못했으며,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는 모든 백성이 반병신으로 전락하는 그 시기에, 이 때다 싶어 나라 밖 적들은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배신의 정치가 낳은 결과는 너무나 가혹했고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했던 그들은 백성을 철저하게 배신했습니다. 그럼에도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말은 입에 달고 살았으니 그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연산군이 쫓겨난 지 80여 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나라는 망신창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또다시 치욕으로 얼룩진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조선은 재기 불능의 식물인간으로 전락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역사를 겪고도 조선의 집권세력은 쇄신되지 못했으며, 백성들 또한 깨어나기에는 항상 역부족이었습니다. 배신의 정치에서 파생된 그 무서운 암세포가 온 나라를 얽히고설키고 말았습니다. 결국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아픔으로 이어졌으며, 광복은 되었으나 남북분단이라는 질긴 족쇄가 민족의 허리를 졸라매는 비극적 운명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배신이 단초(端初)가 된 우리의 불행한 근현대사가 걸어온 궤적이 마치 주마등처럼 생생하니 그저 몸서리칠 뿐입니다.

작금 대선 정국에서 그 몹쓸 배신의 악취가 곳곳에서 감지됩니다. 한 때 개혁의 아이콘(icon)으로 각광(脚光) 받던 어느 후보자는 자신을 승승장구의 비단길로 인도해 준 주군(主君)의 등에 배신의 비수(匕首)를 꽂고 날마다 날선 비판으로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습니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으니 참으로 세상이 야속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가짜 박사학위 총장이 재직했던 염치없는 대학의 어느 전직 교수는 소위 ‘진보’에서 ‘보수’로 스스로를 배신하고 마치 제갈량(諸葛亮)이라도 되는 듯 많은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언동(言動)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의 한 마디에 열 마디의 호된 비판이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 사람만 모르고 있는 듯 합니다. 

배신에는 경계도 없고, 최소한의 도덕적 배려도 없습니다. 민주당의 대표를 역임했던 사람도 철새가 되었고, 또한 민주화의 성지에서 정치적 기반을 닦아 준 광주 시민을 배신하고 개에게 사과를 주는 아주 친절한 사람 곁으로 간 그들의 음흉한 정신세계는 과연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영달을 위한 알량한 정치적 소신을 ‘대승적 차원’이란 거창한 술수로 포장하는 기만(欺瞞)이 차라리 처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분명, 역사가 그들을 준엄하게 심판할 것입니다. 

바야흐로 배신의 계절입니다. 마르크스(Wilhelm Marx)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번은 비극으로”라고 했는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지금 가장 비극적인 배신의 흑역사(黑歷史)가 되풀이 되는 악순환 속에서 고된 삶을 영위 당하는 불행한 국민이 되고 말았습니다.

필자는 상심한 마음으로 시인 조병화의 '별도 울 때가'라는 시를 조용히 읊조려봅니다. 어쩌면 배신이 오히려 떳떳한 세상이니 시인의 시어(詩語)처럼 밤하늘의 별조차 소리 없이 웁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아니라 글썽글썽 눈물 흘리는 슬픈 별입니다. 배신이 일상화 된 비상식적인 세상에서 사는 국민들은 지금 그 별이 되어 피눈물로 웁니다. 

머리 끝에서 흐르는 뜨거운 피가 별처럼 슬픈 눈을 벌겋게 충혈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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