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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무렵 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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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무렵 한 시간
  • 나동주
  • 승인 2020.01.16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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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동주∥前 영광교육장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는 빈곤한 프랑스 농민의 고단한 일상을 우수(憂愁)에 찬 분위기와 서사적 장엄함으로 담아 그린 사실주의 화가입니다.

작품 활동 초기에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 싸구려 누드화를 그려 겨우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살롱전(salon展)에 지속적으로 출품했으나 번번이 입선에 실패하는 등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소위 일류 화가는 아닌 듯 싶었습니다.

그러나 1850년에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작품이 입선하게 되어 프랑스 미술계에 비로소 등단하기에 이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씨를 뿌리는 농부를 통해 노동의 고단함을 암시하는 한편, 대지와 투쟁하며 살아가는 농부들의 모습을 숭고하고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848년 프랑스‘2월 혁명’이 일어날 당시에는 그림의 주된 고객이었던 부르주아(bourgeois)들이 사회 상황을 불안한 마음으로 주시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빈농 문제를 다룬 ‘혁명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그동안 그림의 주제로 대접 받지 못했던 평범한 농부가 화면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보수주의자들은 불안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찬사를 보내는 등 갈등 양상으로 치달았습니다.

이에 밀레는 “설사 나를 사회주의자로 여긴다고 해도 인간을 그리는 것이야말로 나를 가장 자극하는 것이다.”라며 평범한 노동의 존귀함과 그에 대한 연민을 표현했을 뿐이라며 이러한 사회적 갈등에 정면으로 대항합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857년 밀레는 '이삭 줍는 여인들'을 출품하면서 다시 한 번 일부 비평가들에게는 혹평을,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선 ‘하층민을 대변하는 운명의 세 여신’이라는 찬사를 받습니다. 서사적 자연주의의 정수(精髓)라는 평을 듣는 이 작품은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농촌의 나이 든 여인 셋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황금빛 햇살에 물든 들판과 여인들은 엄숙하고 장엄해 보이지만, 이삭을 줍는 행위는 당시 빈농들에게 지주(地主)들이 베푸는 선심 행위로써 빈농층의 고단한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매우 강렬한 그림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 고발적 도발이 면면이 묻어나는 이 작품으로 밀레는 빵 한 조각 살 수 없었던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 비교적 안정된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2년 후인 1859년에 밀레는 '만종'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깁니다. 파리 오르세(Musée d’Orsay)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석양으로 물든 그림 속 먼 하늘에는 몇 마리 새들이 날아갑니다. 밭에는 캐다 만 감자가 흩어져 있고, 하루 종일 수고를 다한 농기구가 부부 옆에 놓여 있습니다. 땅과 하늘의 경계에는 그 경계를 이어주는 교회당이 있고, 감자를 캐던 부부가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저녁을 맞은 사람들의 일상적인 기도라 하기에는 너무도 간절해 보입니다.

'그들이 올리는 기도는 감사의 기도일까, 갈망의 기도일까?’ 무릇 기도하는 부부의 좁은 어깨는 좀처럼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 처량하기만 합니다. 석양의 기울어진 햇살은 힘없이 모은 이들의 두 손을 더욱 시리게 합니다. 이처럼 밀레의 '만종'은 언뜻 평화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내면 깊숙이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겨울비 촉촉이 내리는 지난 해 어느 날, 프랑스에서 필자가 찾은 만종의 들녘은 아스라한 지평선을 숙명처럼 보듬고 있었습니다. 아련한 슬픔이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이 작품의 비밀은 수 십 년이 지난 후에야 풀렸습니다. 루브르(Le musée du Louvre) 미술관이 적외선을 투사(投射)해서 관찰한 결과 '만종'의 초벌 그림에는 바구니 안에 감자가 아니라 어린아이가 그려져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결국은 부부의 기도는 평화로운 저녁과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굶주림을 못 이겨 저 세상으로 떠난 불쌍한 아기가 천국으로 갈 수 있게 해달라는 갈망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처음 이 그림을 본 밀레의 친구가 계급 갈등을 지나치게 조장하는 것 같다며 그림을 수정하라고 부탁하여 그림 속의 어린아이를 감자로 바꿔 그렸다고 전해집니다.

세상을 밝게 비추던 과장된 빛이 사라지고 모든 풍경의 진실이 처연(悽然)하게 드러나는 해 질 무렵 그 시간에 하루가 힘겨웠던 부부는 일손을 멈추고 두 손을 모읍니다. 먼저 간 아이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으로 그 날 해 질 무렵에 남편과 아내는 서로의 슬픔에 또 다른 슬픔이 덧씌워질까 봐 꺼이꺼이 울지도 못하고 신실(信實)한 기도로 애처로운 마음을 달래봅니다. 그 기도를 통해 ‘해질 무렵 한 시간’의 저미는 슬픔을 담대하게 버텨냅니다.

해 질 무렵 한 시간!

누구에게나 절절히 아려오는 시간입니다.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꿈과 회한(悔恨)을 안고 사는 모두의 손을 따습게 잡아주어야만 하는 사랑의 시간입니다. 속절없이 누군가 다가와 힘없는 내 손을 잡아주기를 기다립니다. 한 낮의 뜨거운 태양도 끝내 지우지 못한 이수동의 살빛「낮달」처럼 살며시 다가와 지쳐버린 가녀린 내 손을 다잡아주기를 원합니다. 

'만종'의 간절함으로, 아련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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