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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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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이다
  • 백도현
  • 승인 2017.03.10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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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현∥전라남도교육청 학생생활안전과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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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먼저 안부를 여쭌다.
“진정, 그대에게 봄은 어떤 모습으로 오는가?”

‘봄’의 어원은 다양하다. 불의 옛말인 ‘블〔火〕’과 ‘오다’의 명사형 ‘옴〔來〕’이 합해져서 ‘따뜻한 불의 온기가 다가옴’을 가리킨다는 이야기와 우리말 ‘보다〔見〕’라는 말의 명사형 ‘봄’에서 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봄이 오면서 겨우내 얼어붙었던 생명의 모습들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말이다.

한자어 ‘춘(春)’은 뽕나무 상(桑) 자와 해를 뜻하는 일(日)자의 회의문자로써 ‘봄 햇살을 받아 뽕나무의 여린 새 움이 힘차게 돋아나는 때’를 뜻하는 의미라고 한다. 그리고 영어의 ’스프링(spring)’은 원래 ‘돌 틈 사이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옹달샘’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앞의 어원에서 보듯이 우리말 ‘보다〔見〕’라는 말의 명사형인 ‘봄’을 제외하고는 다들 그 어원이 자연중심의 명명(命名)법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말 ‘보다’의 명사형 ‘봄’은 인간중심의 명명(命名)법을 따르고 있다. 단순한 문제 같지만 사람 중심의 이름이라는 사실이 왠지 철학적 고민을 함축하고 있지 않나 여겨지는 대목이다.

또한, 이어령 님은 「다시 읽는 한국시」에서 “겨울과 봄의 미세한 차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이마의 추위(꽃샘추위)’가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활짝 열린 봄의 생명감은 ‘웅숭거리고 살아온 겨울의 서러운 삶’을 통해서만 서로 감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고 쓰고 있다. 이는 결국 겨울의 시간 뒤에 찾아오는 봄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3월이 되면 누구나 봄을 이야기한다. 자연의 물리적인 환경으로써의 ‘봄’이야 선택의 여지가 있겠는가마는 정서적인 삶의 질로써의 봄기운은 사람마다 제각각일 것이리라. 필자가 화두로 던진 질문 또한 후자의 의미를 내포한 질문이었음은 짐작했으리라 사료된다. 어떤 이는 이 봄의 시작과 함께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이와 때로는 더욱 웅크리는 사람의 소식을 종종 접할 때마다 누구에게나 이 봄이 희망으로만 다가오는 건 아니구나 싶다.  

이런 다름을 단순히 개인의 능력 차이로 치부하기에는 왠지 마땅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 일견 씁쓸함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자연의 변화처럼 우리의 삶도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움을 틔우는 새싹들을 함께 바라보며 반가움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그러하지 못한 이들을 확인할 때마다 밀려오는 안타까움은 슬프기까지 하다.

더군다나 이번 봄은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와 같은 기분을 더 강하게 인식하는 시간이지 않을까 싶다. 대통령을 둘러싼 많은 일들로 인해 국민 개인들이 느껴야했을 기분이란 실로 그 충격이 더 컸으리라 생각된다. 근본적으로 공정한 조건 안에서 자신의 나태함과 게으름으로 인해 얻게 되는 부족한 결과야 누구나 인정하고 수긍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조건으로 인해 얻어진 결과는 자연스레 그 책임을 세상의 환경 탓으로 돌리기 일쑤다.

많은 이들이 흔히 인용하는 고사성어(故事成語) 가운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 있다. 이는 ‘봄이 와도 봄이 아니다.’는 뜻을 가진 당(唐)나라 시인 동방규의 작품 ‘소군원(昭君怨)’에 나오는 시구이다. 오죽하였으면 봄이 와도 봄이 아니라고 하였겠는가 싶다. 누구에게나 똑 같은 봄은 아니다. 모두가 똑같은 마음으로 3월, 이 새봄의 시간을 기쁘고 설레는 맘으로 마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는 우리네 삶의 형편이 다양하다보니 계절의 변화를 다 같은 생각으로 경험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함께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 인간사회의 구조적 시스템의 합리성과 정당성은 마련되어야 하고 또한 그러한 ‘더불어 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우리 모두는 동참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의미일 것이고 말이다.

다시 ‘봄’이다. 이 새봄에 우리 모두가 다 같이 행복하게 맞이할 수 있는 진정한 봄을 준비하기 위한 고민을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다. 나와 다르게 봄을 맞이하는 이들 가운데 나보다 불행한 모습으로 이 봄의 한복판을 함께 지나가고 있을 이들도 더불어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그런 봄을 위한 준비 말이다.  

3월, 우리네 학교들도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다. 개나리와 진달래처럼 맑고 고운 아이들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환한 웃으며 즐겁게 생활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그 아이들 가운데서도 누군가는 무겁고 힘겹게 교문을 드나드는 모습들이 있을 것이다. 학교가 또는 우리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그런 아이들을 어떻게 보듬고 함께 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도교육청에서는 2014년부터 가정해체로 인해 어른, 특히 엄마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맘-품지원단’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 전남의 경우,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는 가정을 떠나고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 타 지역에 거주하여 조부모께서 아이들을 돌보는 가정이 많다. 이런 가정의 아이들에게 ‘엄마의 따뜻한 품’(맘-품)을 제공하고자 만든 사업이다.

서툰 시행착오(試行錯誤)를 거치면서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신들의 자녀처럼 돌봄을 실천할 수 있는 어머니들로 단원들도 정예화 되었으며, 배려대상 학생들에게 실질적으로 우리 지역사회가 지원할 수 있는 민간 후원이 필요하여 ‘맘-품지원단 후원의 집’도 2016년 기준 237개 업소가 참여하였다. 후원의 집들은 주로 아이들이 실생활에서 자주 이용하는 가게들로 미용실, 목욕탕, 병원, 문구점, 서점, 식당들이다. 

어느 군지역의 미용사 협회에서는 관내 전체 미용사 분들께서 배려대상 학생들에게 무료로 미용을 해주겠다고 결의를 하고 실천하는 경우도 있으며, 편의점 주인 가운데에는 월 일정액의 쿠폰을 제공함으로써 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들을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경우도 있다. 2017년 이 새봄에도 모든 학교들에 맘-품지원단과 배려대상학생 추천, 그리고 후원의 집에 참여해주실 분들을 추천해 주십사 안내도 해드렸다.

거시적인 국가적 교육정책의 담론도 필요하고 치열한 토론을 통해 건강한 교육환경을 만들어가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한 학생들을 가족의 구성원처럼 보듬어주는 실천 또한 절실하다. 오늘도 말없이 그런 아이들의 손을 잡고 미용실이나 극장으로 향하고 있을 아름다운 우리 맘-품 어머니들의 모습이 선하다. 어쩌면, 진정한 봄은 이런 빛깔과 모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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