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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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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
  • 문지훈
  • 승인 2016.07.2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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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훈∥장성월평초 교사

◆ 胸中成竹(대나무를 그리기 전에 가슴 속에 대나무를 품는다)

굳이 열차를 타고 토론을 해야 하는가? 지도 선생님이기에 앞서 스스로 던진 질문이다. 여행을 통해 얻는 경험의 소중함은 굳이 말할 필요 없다. 그러나 독서토론과 여행을 유의미하게 접목시키기 위해 좀 더 냉정한 시각으로 토의해야 했다.

그날 이후 우리 선생님들은 긴 시간 동안 행사 목적에 부합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여행 목적지와 토론테마를 연결하여 책을 선정했다. 1박2일간의 짧은 일정과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 시끄러운 열차 내에서의 활동 등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프로그램을 위해 밤샘 끝에 ‘문향독서토론열차’ 기행은 시작됐다.

◆ 破墨(짙은 먹으로 옅은 먹을 깨트리고 옅은 먹으로 짙은 먹을 녹인다)

출발일 장성역사 앞. 사람은 많으나 웃음은 적었다. 관내 초6, 중1 학생들과 토론도우미 봉사를 나온 장성고, 문향고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묘한 긴장감에 떠드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몇몇은 아는 사람이 없는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상행선 토론열차는 ‘마음열기’와 ‘독서골든벨’로 시작했다. 모둠원끼리 종이를 보지 않은 채, 서로의 얼굴을 그리거나 프로필을 대신 작성하는 모습에서 웃음이 터졌다. 피카소도 보이고 조석도 보이고 다섯 살배기 딸의 그림도 보였다. 굳어 있던 얼음이 깨지고 어느새 우리 편이 생겼다.

‘독서골든벨’로 가슴 뿐 아니라 머리도 맞댔다. 미리 학교로 배부된 선정도서를 꺼내어 우리 모둠만의 비밀 문제를 만들었다. 너무 어려우면 선택되지 않을 것이요, 너무 쉬우면 이득이 없다. 입은 가리고 눈은 굴린다. 정답은 소리치고 오답에는 웃었다. 간절한 표정으로 도우미 선생님을 바라보지만 끄덕임도 고개저음도 아닐 때는 미안한 눈빛 뿐. 결과를 수합할 때 아이들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은 열차에 오르기 전과 사뭇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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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虎溪三笑(지성을 나누느라 호계를 건너는 것도 몰랐구나)

본 토론의 막이 올랐다. 첫 논제를 브레인라이팅으로 시작했다. 모둠 활동판과 창문에 다양한 의견이 가득했다. 장난삼아 첫 메모를 작성했던 아이들도 어느새 자신의 의견에 논리를 더했다. 고등학생 도우미선생님의 질문이 날카롭다. 조용히 바라보던 친구가 메모를 떼어 무언가를 더 적었다. 여기 저기 붙어있던 많은 메모가 어느새 제자리를 찾아갔다. 알록달록 다양한 메모가 가지런히 정리된 토론활동판은 그것 자체로 그림이 된다. ‘이게 뭐야?’ 했던 생각들이 ‘이제 뭐다!’로 바뀌었다.

두 번째 논제는 찬반대립토론으로 진행했다. 열차의 여건상 같은 조로 묶여 있는 두 모둠이 각각의 입장으로 토론에 임했다. 입장의 강제 배분은 장단점이 있었지만 상대의 반론을 예상하고 재반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깊이 있는 논의가 가능했다. 서로를 잘 아는 복서가 쉽게 주먹을 날리기 어려운 것처럼 날카로운 긴장감이 흘렀다. 몇 차례 공방이 오가다 작전이 고갈되었을 때 양 팀의 토론판에 메모지를 붙였다. 비슷한 가치가 대립하는 현실적인 상황으로 아이들을 밀어 넣었다. ‘승패에 별 의미가 없다.’라고 느끼는 순간 목적지에 곧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네 시간이 훌쩍 지났다.

◆ 疎疎密密(성긴 곳은 더 성기게 빽빽한 곳은 더 빽빽하게)

열차에서의 치열한 토론이 끝나자마자 이글거리는 태양을 만났다. 짧은 일정으로 버스 이동을 최소화한 탓에 잠시 눈 붙일 틈도 없었다. 더 배우려면 놀아야 했다. 서울시청도서관으로 갔다. 아이들과 간단히 목을 축이며 청사 안내도를 살핀다. 도서관이 목적이었지만 볼 것이 많아 안내 책자만 쥐어주고 풀어주었다. 슬펐거나 기뻤던 일들이 사진과 영상으로 펼쳐졌다.

모둠장에게 장학사님이 보낸 미션이 도착했다. 아이들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가방과 책을 모두 내게 던져놓고 사라졌다. 간발의 차로 미션에 실패한 아이들을 위로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광화문 광장, 위대한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손가락으로 브이(v) 대신 한글 자음을 만들어 찍자는 제안을 따라 준 아이들이 고맙다. 나는 ‘이응’을 선택했다. 해치는 정의, 청렴 등 많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이 순간만은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세운 해치가 그 능력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때마침 아이스크림이 나왔기 때문이다.

교보문고로 내려가는 길에 분수광장이 나왔다. 아이들과 장난하며 웃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세월호 집회 현장 앞이었다. 놀라운 것은 신나게 뛰어놀던 아이들이 엄숙한 참배와 아울러 사진들을 살펴보거나 진지하게 설명을 듣고 난 후, 특별법 개정에 서명을 하였다. 예정에 없던 참여와 교보문고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인사동 거리를 먼발치에서 봐야했지만 난, 아이들이 자랑스러웠다.

교보문고에서 스스로 고른 책을 한 권씩 들고 이번 토론열차의 주제 해결을 위해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청계천을 걸었다. 인사동 예술의 거리를 보기 위해 발품을 판 학생이 있는가 하면, 청계천에 발을 담그고 서로 고른 책의 내용을 묻는 모습도 보였다. 터벅터벅 걷던 학생이 책에서 읽은 신장석을 발견했노라고 눈을 반짝이며 뛰어왔다. 어떤 아이는 책에서 보았던 다리를 꼭 보고 싶다며 모둠원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청계천에 각자의 역사를 새기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가슴이 뿌듯했다.

저녁 삼계탕에 하루의 마지막 햇살을 담아 들이키니 어둠이 찾아왔다. 신나는 공연을 보기 위해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직접 고른 책을 열심히 읽는 아이들의 모습이 기특하다. 활기차고 신나는 공연 덕에 피곤해서 모두 졸 것이라 예단한 게 기우가 되었다.

공연이 끝나고, 어느새 키 큰 느티나무 꼭대기에 걸린 보름달을 보며 숙소로 돌아와 하루를 정리했다. 다음 날 아침 폭염주의보에 몽촌토성을 포기하고 국립중앙박물관 일정을 넉넉하게 편성했다. 조별로 미리 신청해 둔 청년 멘토를 따라 다니며 설명을 들었다. 미션을 수행하고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나니 벌써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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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無法以法(변화를 알고 터득한 연후에는 기존의 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가끔 이런 아이를 만났다. 공부도 잘하고 영특한데 별 중요치 않은 사소한 질문을 많이 하는 아이, 정답에 길들여진 탓이리라. 내려오는 열차에서는 그런 질문이 거의 없어졌다. 토론열차의 여정을 타임라인으로 만드는 활동, 모둠별로 창의성을 발휘하니 다양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틀 동안 여정을 함께 한 아이들이 맞는지 의심할 정도로 각양각색의 색깔과 느낌이 펼쳐졌다. 이어진 모둠문장 만들기 토론에서도 작품이 쏟아졌다. 여행과 역사를 주제로 함께 만든 시들을 톡으로 공유하여 함께 읽노라니 이틀 간 보고 느꼈던 장면들이 환하게 그려졌다.

어제는 쭈뼛대거나 장난하던 아이가 모둠을 대표하여 자신 있게 발표하는 모습에 박수가 터졌다. 아이들 표현처럼 ‘이번 여행은 우리 모두에게 선물이요,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이며, 물과 구름이고, 행복을 채워주는 책이자, 채우기 나름인 스케치북’이었다.

 烘雲托月(구름을 그을려 달을 드러낸다)

이번 ‘문향장성독서토론열차’ 운영에 있어 관내 고등학생 자원봉사자를 토론도우미로 배치한 일은 신의 한 수였다. 각 모둠의 학생들이 고등학생 봉사자를 형이나 언니로 부르지 않고 선생님으로 부르며 따른 것도 토론도우미들이 제 역할을 다했다는 방증이었다. ‘선생님 드리려고요’ 하며 음료수를 들고 뛰어간 아이가 도우미학생에게 건네는 모습이나, 아이 짐을 나눠들고 낑낑대며 짐칸에 올려놓는 토론도우미들의 모습에 우리들은 입을 모아 칭찬했다.

우리들은 토론도우미들에게 잔일을 맡길 수 있어 프로그램의 진행 방향과 속도를 살펴 볼 여유가 생겼다. 달을 직접 그릴 필요가 없이 구름이 잘 그을리는지 살피며, 각자의 그림을 그리도록 지켜보았다. 이 풍성하고 넉넉한 그림 위에 낙관을 갈음하여 장성고, 문향고 독서토론도우미 학생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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