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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정치(政治)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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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정치(政治)를 말하다
  • 백도현
  • 승인 2016.03.08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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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현∥전남교육청 학생생활안전과 장학사

‘정치(政治)’하면 마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의 전유물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치의 어원은 영어로 폴리틱스(politics), 그리스어의 폴리스(police)에서 유래된 것으로 좀은 의미로는 ‘나랏일 하는 정치가’의 개념에서부터 ‘사람들 사이의 의견 차이나 이해관계를 둘러싼 다툼을 해결하는 과정’으로 넓은 의미까지 내포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언론의 분류에서부터 ‘정치’는 일상 속에서 좁은 의미로 한정되어 사용되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도 정치라는 단어를 일상생활 속 광의(廣義)의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을 주저한다. 특히 정치가들의 행위에 대해 부정적 인식이 강한 집단이나 사회일수록 정치는 좁은 의미의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롭게 일상 속 단어로 편하게 다가오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지극히 정치적인 활동들을 반복해서 하고 있다. 서로 다른 생각의 차이를 좁혀보기 위한 노력이나 다툼의 갈등 상황 속에서 화해조정 활동을 하는 것처럼 지극히 정치적인 활동에 익숙해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어로써 자신의 활동을 정치적 행위라고 명명하기를 꺼려하거나 몰랐다는 판단이 더욱 솔직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이제는 우리가 정치라는 단어의 의미 폭을 확장해서 수월하고 편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이렇게 정치를 보다 가벼운 의미로 즐겨 사용하자는 이유에는 좁은 의미의 정치를 하는 사람들, 즉 정치가들이 요즘 우리 사회 속에서 보여주는 행태들이 정치를 부정적인 의미로 강화시켜가고 있다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2003년, 필자에게는 의도하지 않은 삶의 궤적 변화로 인해 혼란스러운 한 해였다. 그 해 여름 힘든 시간들을 위로받기 위해 우연한 제안으로 서유럽 땅을 밟을 수 있는 첫 경험의 기회가 있었다. 그때의 설렘이란 언어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웠다. 여행을 앞두고 관심있게 읽었던 작가의 글이 있었다. 그 작가는 다름 아닌 ‘홍세화’였다.

그는 일찍이 70년대 학생운동의 결과로 프랑스에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하면서 택시운전수로 생계를 이어가던 시절의 에피소드를 책으로 만들어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가 우리에게 던져주고 싶었던 메시지는 어떤 의도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글을 읽는 필자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문화적 가치 혼돈을 자극해주었다.

그의 글 속 많은 이야기 가운데 유독 지금까지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고3 프랑스 학생을 태웠던 일화였다. 그 학생은 이제 막 대학진학을 앞둔 학생이었고 학업 성적이 우리나라로 치자면 서울대 법대를 지원할 수 있는 실력이었다. 한국 사회의 대학진학관점을 가지고 있던 작가는 학생의 진학학과를 물었고 그 학생은 작가의 기대와 달리 ‘철학’이라고 답했다는 이야기였다.

철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그 학생의 이유가 우리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공무원이었던 당시의 필자에게는 작가가 받았을 신선함 그 이상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법률가나 의사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문제를 해석하는 능력만 있으면 가능하지만, 철학은 평생을 창조적 사고와 행위로 살아갈 수 있기에 그 길을 선택했다는 그 학생의 학과 선택의 이유가 왜 그리도 낭만적인 메아리로 들리던지 부럽고 존경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찾아간 프랑스 파리에서 불문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가이드를 통해 전해들은 프랑스는 우리나라와 참 많이 달라보였다. 단순하게 물리적인 환경의 다름을 넘어서서 문화적 가치 기준의 다름이 필자의 관심대상이었다. 어떻게 그 나라의 학생들은 우리와 다르게 자신의 진로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지가 궁금증을 유발했다.

그리고 그 답은 사회적 복지가 기본적으로 튼튼하게 받친다는 것과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 문화적 인식의 차이에 있었다. 13년 전, 프랑스에서 가이드를 담당하던 그 유학생은 세제와 복지가 관건이라고 확신에 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적 시스템이 국민적 동의에 의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프랑스인들의 자유와 평등의식을 꼽았다. 그들의 의식 속에는 ‘똘레랑스’라는 정신적 가치가 교육을 통해 든든하게 자라잡고 있었던 것이다.

13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학입시가 갖는 의미는 단순한 경쟁을 넘어서서 권력의 재편 도구라는 인식이 더욱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경제적 여건의 불균형은 사회적 기득권 진입을 더욱 견고하게 차단하고 그들만의 리그로 만들어버리려는 시스템으로 빠르게 진행되어 온 것은 아닌가 싶다. 교육을 담당하는 한 개인으로서 갖는 안타까움은 그 당시 프랑스를 갔을 때보다 더욱 강하게 자리한다.

이제는 우리 국민 모두가 ‘교육’을 화두로 정치적인 행위를 시작하자. 집단적 이성 논쟁을 시작하자. 더 이상 지금처럼 경쟁을 통해 교사가 양산되는 일에서부터 우리 교육의 문제를 새롭게 진단하고 해법을 같이 찾아보자. 학생과 학부모 모두가 서울대를 우러러보는 사회가 아니라 자신의 꿈과 끼를 마음껏 추구해도 먹고 사는 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근본적인 사회적 안전장치를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지를 모색해보자.

감히 ‘정치(政治)’를 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해주시기를 바란다. 필자는 오늘도 비 내리는 창밖의 풍경이 봄으로 가려는 자연의 몸부림이리라 애써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내가 사는 이 땅 대한민국의 우수한 학생들도 법학도나 의사만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철학자와 과학자가 되겠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문화의 봄, 정치의 봄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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