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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꾸짖은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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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꾸짖은 선비
  • 안용호
  • 승인 2009.09.24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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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호∥前 광주시교육청 장학담당 장학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 조 윌슨 의원이 오바마 대통령을 향해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해 의회가 제재 결의를 하였다. 오바마에 대한 증오라는 말과 함께 인종주의적 요소까지 이야기가 되면서 조야가 매우 시끄럽다. 그러나 미국 민주주의 꽃이 시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장의 그림을 넘기면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도끼를 들고 국회의 문을 부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국회의장석에서 의사봉을 서로 뺏으려고 몸싸움을 하고 있다. 그림의 밑 부분에는 인사 청문회가 열리는데 위장전입과 탈세는 보통이고 그 죄질이 가볍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변명하며 냉소적인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이 참담할 지경이다.

다시 한 장을 넘기니 당나라 궁전이라. 위징이 “대의란 정치에 있어서 천금과 같은 것. 말에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결과가 있어야 하옵니다.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과 같습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기도 합니다. 이것이 정치의 근본입니다.”라고 말하며 목숨을 건다.

위징은 태자 이건성 밑에서 일했으나 ‘현무문의 난’으로 태종에 재발탁되어 방현령 등과 함께 당나라 300년 기틀을 만드는 충신이 된다. 목숨을 걸고 직언을 하는 충신으로 타의 귀감이 된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나라에도 목숨을 걸고 임금님께 충간을 한 신하는 많았다. 도끼를 들고 가서 올리는 ‘지부상소’를 한 선비, 우탁, 조헌, 최익현 등이 그들이다.

우탁은 역을 하룻밤에 외워 ‘주부자가 다시 동방에 태어났도다.’라는 칭찬을 원나라 순제에게 들었고, 성리학을 널리 보급하였다. 정몽주가 우탁을 동방사림의 조종으로 받드는 상소를 올렸고, 조선조에서는 이황이 주창하여 안동군 예안현에 ‘역동서원’을 창건할 정도였다.

이 우탁은 지부상소를 제일 처음 올린 사람이다. 고려 충선왕 때 우탁은 감찰규정이라는 자리에 있었다. 8월에 즉위한 충선왕은 10월 24일 아버지 충렬왕의 후궁이었던 숙창원비와 눈이 맞게 된다. 소문을 들은 우탁은 상복을 입고 거적을 메고 도끼를 든 채로 대궐로 들어가 상소문을 올렸다. 이후 왕은 부끄러워 다시는 선왕의 후궁과 정을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탁이 행한 지부상소는 벼슬에 있는 사람이 왕에게 올린 상소의 극단적인 모범이 되었다.

다음으로는 병자수호조약 체결을 앞두고 올린 면암 최익현의 병자지부 상소가 있다. 고종 때 13번이나 상소를 올렸고, 대원군의 집권을 질타하기도 했다. 높은 벼슬을 모두 거절하고, 의병활동도 하다가 잡혀 대마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무서운 의인이었다.

다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명가도’ 즉,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하자 대궐 밖에서 사흘 동안 엎드려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고 청했던 조헌의 지부상소가 있다. 지부상소는 아니지만 삼인대에서 모여 죽을 줄을 뻔히 알면서도 신씨 복위 상소를 올린 눌재 박상, 충암 김정 같은 선비들도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상소는 설총의 ‘화왕계’이다. 신문왕의 요청으로 이야기 형식으로 들려주는 화왕계는 화왕과 장미 그리고 백두옹을 인간계의 왕과 간신, 그리고 충신에 빗대어 이야기한 내용이다. 목숨의 위험이 따르는 상소문은 정의의 문학이자 정치문화의 꽃이다.

상소문을 올리는 그 서슬 퍼런 정의감과 꼿꼿한 자세, 직설의 정직함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절실한 정론이라 생각된다. 도끼를 들고 들어가 죽음을 무릅쓰고 간했으며, 벼슬을 버리면서까지 직간을 했고, 머리를 찧으며 이마에 피를 흘릴 때까지 간했다. 이것이 선비들이 가는 길이었다. 이런 선비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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