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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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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 안용호
  • 승인 2009.12.02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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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호∥前 광주시교육청 장학담당 장학관

'광주전남 백범기념사업회’에서 매년 추진하는 백범김구의 호남 잠행과 보은의 여정을 따라가는 체험학습에 동행했다. 가다가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 마을에 있는 홍암 나철선생님의 유적비를 둘러보았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유적비와 유물전시관은 너무나 초라했다.

차에 올라 나철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들으면서 부끄러운 마음과 우리 것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착찹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나철은 지금까지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이름 없는 애국자였다. 무릇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전쟁, 외교, 의열, 정신문화운동 그리고 자결순국이라는 여러 방법으로 전개되었는데 나철이야말로 이 모든 방법을 다 써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므로 가히 독립운동의 화신이,요 선각자요, 아버지라 불러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암 나철(1863-1916)은 1963년 전라남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이라는 마을에서 신모님이 금관에 옥대를 띤 천동을 안고 무지개를 타고 제석산에서 집으로 내려오는 태몽을 꾸고 태어났다. 태몽처럼 나철은 신동으로 자랐다고 한다. 그리고 진보성향의 개화주의자 왕석보에게 학문을 배우고, 김윤식을 만나 다른 새로운 학문을 닦았으며, 백봉도사를 만나 비서를 전해받고 ‘대종교’를 중광하게 된다. 나철이 태어난 시대는 우리나라가 일제 침략을 받아 저들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위기의 시대였다.

일제침략은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조약 후 20년 간 온갖 장난을 하다가 1894년 청일전쟁을 도발하여 일제 침략의 제 2단계를 밟았다. 그리고 10년 후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켰으니 이것이 일제침략의 제 3단계였던 것이다. 그리고 1905년의 을사조약과 1910년의 경술국치로 치달았던 것이다.

나철의 항일 독립운동은 맨 처음 외교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으로 밀선을 타고 건너가 러·일 강화회의가 진행 중인 포츠머스 군항으로 가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으려 한 것이다. 이것이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자, 오기호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천황에게 독립을 요구하였다. 이같이 과감한 외교활동은 보통 사람은 생각도 못할 일이며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서울에 파견하고, 조선 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협력하여 덕수궁을 포위하였으며 을사오적의 망동에 힘입어 고종을 위협하여 황제의 국새를 빼앗아 찍음으로써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첫번째 독립운동이 효과가 없자 나철은 을사오적을 처단하기로 결심 한다. 바로 을사오적을 처단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 새로운 자주적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 나철의 생각이었다.

나철은 권총 50정을 구입하고 결사대원 18명을 규합하여 을사오적을 처단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어찌하랴. 기일이 촉박하고 대원들의 연습 부족으로 거사는 실패하고 만다. 나철의 을사오적 처단 의거는 일제하의 친일파 처단의거의 효시가 되었음은 그 뒤의 역사가 증명한다.

나철이 시도한 세번째 독립운동은 단군교의 중광이었다. 중광이란 문자 그대로 ‘다시 빛난다’는 뜻으로 부활을 뜻한다. 나철은 단군교를 통해 안으로 우리민족의 단합을 과시하고 밖으로는 침략자 일제를 역동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나철은 대종교의 교세를 국외로 확대하여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게 하였는데 이것을 안 일제는 대종교를 불온 단체로 낙인찍어 모질게 탄압하였다. 이에 나철은 죽음으로써 일제에 맞섰다.

대종교 신자들은 국내에서 ‘대한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하여 지하운동을 시작하였다. 나철이 죽은 뒤에도 국외에서 맹렬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결과 1917년 대동단결선언, 1918년의 대한 독립선언이 나와 다음해 일어나는 3·1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도 하였다. 상하이로 나가 있던 나철의 충실한 신자 신규식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초를 닦았고, 백포 서일과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등의 독립군을 양성하여 빛나는 청산리 대첩이라는 개가도 올렸다.

나철 자신이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큰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그가 순국한 후에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 컸다. 일제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게 하고, 700년간 외세의 힘과 정치적 이유 그리고 우리의 무관심으로 땅 속 깊이 묻히고 끊겼던 우리의 혼인 단군정신을 불러내어 이어주고 단군교를 ‘중광’함으로써 우리에게 민족정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해준 사람이 바로 나철이었다.

홍암 나철은 우리가 받들어야 할 독립운동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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