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노파의 고추
상태바
노파의 고추
  • 오덕렬
  • 승인 2009.12.11 13: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덕렬∥광주문협 회장·前 광주고 교장

바구니에 소복이 쌓인 검붉은 고추가 빗방울에 더욱 싱싱하다. 그것은 며칠째 더위에 시달린 서울 생활이 위안을 받기에 충분하다. 평소에도 여름이면 즐겨 찾은 것이 고추인데 요 며칠째는 구경도 못했으니 더욱 그러하다.

벌써 일주일째, 아침은 이 식당, 저녁은 저 식당을 찾으며 삼시세 때 매식이다. 처음 한 이틀간은 괜찮다 싶더니 이제 식사 때가 오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따뜻찮은 식당밥은 정성과 사랑이 담기지 않아 늘 한구석은 빈 것 같은 상태다. 무표정한 마네킹을 대하는 것 같은 식사 시간이다. 예쁜 마네킹이지만 어디 그게 숨을 쉬는가.

코가 예쁘고, 눈이 예쁜, 그리고 밋밋한 몸매의 마네킹은 보기에만 예쁠 뿐인 것을……. 하지만 한더위에 내가 좋아 사서 하는 고생이다. 여름방학 중에 자비 부담 일반 연수를 지원했던 것이다. 덥고 짜증스런 생활이었지만 지금은 토요일 오후다. 빗방울을 그대로 맞으며 남산에 오르고 있다. 국립 도서관, 식물원을 지나 정상에 오르는 돌계단을 세고 있다.

아직 비는 세차게 내리지 않고 잎 넓은 나무에 빗방울 드는 소리가 오히려 다정하다. 가끔 연인들끼리 우산을 받고 올라가기도 하지만 빗방울에 신경을 쓰는 아직 없다. 천천히 오르다가 중턱쯤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늘 밥상머리에서 생각했던 소담한 고추가 눈에 잡힌 것이다.

한 노파가 불그레한 풋고추를 바구니에 소복이 쌓아 놓고 있는데 옆에는 동동주 덩이에 조롱박아지가 떠 있다. 술보다는 고추나 몇 개 툭툭 분질러 된장에 감아 먹고 싶은 생각이 인다. 그러나, 어쩌랴. 손에는 각전이 잡히지 않는 것을. 몽땅 팔아도 고액권 한 장 어치가 될 것 같지 않은데 그것을 노파에게 내밀 수는 없다.

검불그레한 풋고추, 먹기에 안성맞춤인 고추다. 맛 좋은 된장과 시원한 냉수에 만 밥, 거기에 풋고추 툭 분질러 한입 넣으면 알근하면서 입안에 확도는 감칠맛은 여름이면 고향에서 즐기던 맛이다. 고향집의 뒷밭에는 골붉은 고추가 주렁주렁했다. 어머님은 제일 좋은 것은 아껴두시면서도 바구니에 모춤이 따다가 상에 올리셨다. 여름상을 푸지고 싱그럽게 하기에는 풋고추가 제일이다.

산중턱 호젓한 곳에 풋고추를 놓고 있는 낯선 할머니에게서 왜 이렇게 그리움의 영상들이 떠오를까? 어떻든 고향에 내려간 마음은 고향의 산야를 쏴 다니고 있었다. 우물물을 한 그릇 가득 부어 쌀이 오히려 뉘처럼 섞인 보리밥을 달게 먹었었다. 땀이 비 오듯 하던 여름날에도 손이 시린 그 찬물과 풋고추는 긴 여름날 후출한 때의 참거리에 꼭 따라 다녔다.

참거리를 즐기는 동안 불볕 더위가 한풀 꺾이면 남정네는 정자나무 밑 유선각의 오수에서 깨어 만도리를 하려고 논두렁에 서고 아낙네는 콩밭을 맸다. 배동을 시작한 벼는 확확 달아오른 지열과 저쪽 산봉우리를 가리면서 삼형제로 쏟아지는 소나기에 쑥쑥 자랐다.

소나기에 몰려든 농군 앞에는 농주와 풋고추가 항상 먹음직했다. 술심부름 몇 번 치르고 나면 부엌에서는 저녁 준비에 바쁘다. 잘 마른 보릿대가 아궁이 속에서 톡톡 튀며 불길을 높이고 있을 때면 구수한 연기가 온 집안을 돌면서 구석구석의 모기를 쫓아냈다. 이럴 때면 풋고추를 담은 예쁜 바구니와 함께 누이는 부엌에 들어 어머니를 도왔다.

잠시 지난날의 고향 생활을 그리며 서울의 한복판에서 가당찮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골내기는 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몸에 밴 고향 맛이 좋은 걸 또 어쩌랴. 요새 도회에 나도는 고추란 거개가 촉성 재배거나 온상에서 자란 것이 많아 아예 고추다운 고추는 없다. 비바람을 맞으며 절로 약이 차고 익어가는 시골 고추 예찬론을 펴면 옆에 있던 아내는 “어디 그런 고추가 흔하다우-.” 한 마디를 잊지 않는다.

노파의 고추, 정갈한 바구니에 쌓인 고추를 생각하며 정상까지 올랐다. 서울타워는 쳐다만 보고, 멋쩍게 이곳저곳을 곁눈질하다가 빗속을 빠져나와 내려 왔다. 나는 아까 그 자리에서 또 머뭇거리며 호주머니에 다시 손을 넣어 보았다. 잡히는 것은 없다.

어느덧 비가 기세를 부리며 내리고 있다. 주위는 어둠에 슬슬 가리우려 하였다. 요새 자주 드리던 식당에 들어서서 비를 그었다. 내일은 일요일이다. 중화동 당숙모댁을 찾아가 고추를 장봐다 고향의 맛이나 찾자고 해야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