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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덕렬
  • 승인 2009.12.2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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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렬∥광주문협 회장 · 前 광주고 교장

“수필집 열 권을 정독하겠다.”

어느 해 제야에 새해 설계로 세웠던 일 중의 하나다. 언제부턴가 새해 설계를 조목조목 나열해 놓고 연말에 가서 검토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아마도 학교에 있는 동안 교육 계획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사생활에서 꼭 그렇게 하는 것이 좋으냐, 나쁘냐를 떠나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는 데는 퍽 유익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나날들이지만 구획을 짓고, 시작하고, 마무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한 해가 가니 보내고, 새해가 오니 맞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다. 새해의 노래에도 “오는 봄만 맞으려 말고 내 손으로 만들자”라는 구절이 있지 않은가.

그저 시간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조용한 시간이면 스스로를 정리해 본다. 일년을 치고 보더라도 며칠이나 내 마음대로 보냈겠는가?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새해를 설계하고 있다. 뭐니뭐니 해도 건강을 회복하는 일이 제일 큰일이리라. 지난 시월, 의사 장티푸스로 40도를 오르내리던 고열은 나의 건강을 여지없이 빙점 이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병상의 보름 동안은 생애 최악의 기간이었다. 갑자기 많은 체중을 삼켜버린 열 때문에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조금 우선하자 병실에서 내다보는 창밖의 부산한 발걸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고 연탄수레를 끌고 미는 부부의 모습은 신성했다. 아픈 주사를 놓고도 태연히 “아프지 않지요?”하며 말을 건네던 김 간호원의 서글서글한 눈매와 하얀 까운 위로 알맞게 내민 가슴은 건강의 상징이었다.

건강, 밥 잘 먹는 것이 보약이라던 어른들 말씀을 생각하니 못밥을 게눈 감추듯 하던 때의 건강을 되찾고 싶다. 건강이 회복되면 몇 편의 좋은 글을 쓰리라. 글을 써 보고 싶은 은근한 마음에 불을 붙인 것은 어느 해 세밑이었다.

"수필을 사랑하고 수필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면 그 소질은 이미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방법이란 무엇인가. 독서와 습작이다.”

글을 써 보려는 마음에 용기를 준 치옹 선생님의 말씀이다. 병상의 하루는 지루하다. 똑똑 떨어지는 닝겔주사의 물방울을 세며 시간을 보낸다. 사뭇 아플 때는 옆에서 말을 걸어오는 것도 싫더니 정신이 조금 나니 사람이 그립고 바깥 소식이 알고 싶어졌다. 신문을 뒤적이다가 K일보의 창간기념 문예 작품 공모가 눈길을 끌었다. 공모 장르에 수필이 들어 있지 않은가.

“앗다. K일보가 낫구나!” H일보에 이어 신춘문예 공모에 수필을 넣은 사실이 신문을 돋보이게 하였다. 공모 기사를 머리맡에 놓고는 열이 내려 제 정신이 들 때면 아내도 눈치채지 못하게 깨알 글씨로 메모를 하였다.

겁도 없이 글을 써 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문학 작품은 생애의 숙제로 둘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한 십년쯤 써 보면 작법이 터득되지 않을랑가 싶었다. 그래, 어느 정도 틀이 잡힐 때까지는 침묵을 지키며 습작에 힘쓰자. 작심삼일, 이런 다짐도 뿌리치고 K일보에 ‘때를 기다리는 문패’를 보내고 말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늘상 집안 식구나 제자들의 평만 들어오던 내가 당선에서는 밀려났으나 선자(選者)의 심사평을 받았다.

“한 생활인의 애환을 무리없이 잘 표현하고 있어서, 흔히 수필을 두고 말해지다시피 ‘부담없이’ 읽혀졌다. 그러나 이른바 문학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이야기에서 객관의 높이를 유지할 만큼 승화된 예술성을 보여줘여 한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평으로 만족했다. 어린애의 엄마가 돌맞이 꼬마를 운동장에 놀게 하면서 경주의 승리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한 발 두 발 위태로운 자세지만 몸을 가누는 모습이 한없이 귀엽고 대견할 뿐인 것이다. 걸음걸음을 보며 앞으로 정상으로 걸을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라고나 할까?

평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가 아직 문학수필과는 거리가 있다. 문학수필이고 아니고는 우선 묻어 두고 나일 수 있는 글, 뒷모습만을 멀리서 보고도 나임을 알아보듯 그런 글을 새해에는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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