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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기구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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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기구한 운명
  • 안용호
  • 승인 2010.01.06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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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호∥前 광주시교육청 장학담당 장학관

1904년 8월 도쿄제국대학에서 삼국유사가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고려 충렬왕 7년, 1281년에 일연이 편찬한 후 실로 600년만의 일이었다. 그것도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서 일본인의 손에 의해 출간된 것이다.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었다.

삼국유사는 20세기 100년간 국학 전반에 걸쳐 다양한 조명을 받고 한국학 연구의 중심에 우뚝 서, 대안서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뛰어난 책이 되었다. 지난 100년 동안 삼국유사를 소재로 연구한 논저가 3천 건이 넘고,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만들어 지금 팔리고 있는 책의 가짓수는 367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러면 삼국유사는 처음 나온 뒤부터 줄곧 사랑받아 온 민족의 고전이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냥 잊혀진 책이었다. 그러면 고려를 이은 조선에서도 삼국유사가 현재처럼 추앙받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더러 상소에 인용은 하되 그 가치는 애써 외면되었고 버려졌다.

현재 삼국유사의 초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 확인된 것은 5종류의 판본이나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없다. 조선 중종 7년(1512)에 경주부윤이던 이계복이 간행한 후 남아 있는 것도 완본은 4종뿐이다. 호사문고본과 순암수택본은 일본에 있고, 규장각본과 만송 문고본은 1904년까지 있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해방직전에야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었다.

경주부윤으로 나간 이계복은 왕의 총애를 받은 것을 기회로 경상감사 안당의 간행허가를 받아 삼국유사를 찍어낸다. 당시에도 온전히 남아있는 책이 없어 성주 목사 권주가 구해 준 원본을 활용해 찍었다고 한다. 간혹 이단아가 뜻밖에 저지르는 일이 시대를 바꾸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본다. 그의 안목과 노력 덕에 삼국유사는 그대로 살아남았다. 1512년 12월이었다.

그는 삼국유사가 마모되면 다시 만들어지기를 바랐다. 그런데 1904년에야, 그것도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서 그 꿈이 이루어졌다. 그러면 어떻게 일본에서 간행됐을까? 임진왜란에 참전한 가토 기요마사는 비록 전쟁에서 패했지만 상당한 양의 문화재를 약탈해 본국으로 돌아간다. 왜군의 배에 실린 약탈품 가운데 국보·보물급의 책이 아주 많았다.

그중 이계복이 1512년에 찍은 삼국유사가 포함됐고, 이것은 에도막부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상납됐다. 도쿠가와는 애서가여서 장서각을 만들어 귀중한 책들을 보관했다. 5만 권이 넘는 장서였다. 그가 죽으면서, 역시 책을 좋아하는 아홉 번째 아들 요시나오가 삼국유사를 비롯한 중요한 책들을 물려받았다.

그동안 천황에게 삼국유사를 빌려주기도 하고, 사서를 고용하면서까지 관리하여,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막을 내리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도쿠가와 가문의 장서는 잘 보존돼 나고야 시립 ‘호사문고’의 모태가 됐다. 메이지 유신으로 천황이 탄생한 후 식민 개척을 위한 일꾼을 키우기 우해 제국대학을 만들어 사학과를 설치하고, 다시 국사학과를 독립시키면서 대일본사를 만드는 등 역사 새로 만들기에 탐닉한다. 그리고 삼국유사는 조선을 아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러한 때 제국대학 강사 쓰보이 구메죠의 눈에 들어 온 삼국유사는 보물 자체였다. 이 쓰보이에 의해 삼국유사가 재발견된 것이다. 1891년 독일유학에서 귀국한 쓰보이는 도쿄제대 문과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문과대학 학장이 되던 1904년에 사지총서의 아홉 번째 책으로 삼국유사는 옷을 바꿔 입고 세상에 나왔다. 조선침략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론화 작업의 일환이었음은 당연하다.

일본의 ‘우리 역사 틀리게 보고 지우기 작업’은 시라토리 구라기치부터 본격화된다. 그는 단군고에서 단군전설을 372-551년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한다. 시라토리는 조선과 단군은 5세기 고구려가 만들어 낸 가작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식민의 논리를 주장하는 신호탄에 불과했다. 학자적 양심은 있었던지 삼국유사를 ‘오리지널 현물’이라고 한 말이 긴 여운을 남기며 우리의 옷깃을 만지게 할 뿐이다.

그의 생각은 제자 이마니시 류로 이어지면서 우리 역사는 신화 속으로 사라진다. 이마니시 류는 조선사편수회 책임자였는데 조선사를 만들면서 상고 삼한을 없애고, 3국 이전 한 편으로 축소하여 상고사를 의도적으로 말살해 버린다. 단군조선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근거다. 이렇게 하여 단군조선은 단군신화가 되어 버렸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학교교육이나 우리들의 역사인식이 일제에 의해 편찬된 ‘조선사’에 매몰되어 있는 현실이 안타깝고 부끄럽다. 삼국유사를 연구 안 한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에라도 잃어버린 고조선을 찾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삼국유사는 영원히 우리 것이 될 수 없다. 삼국유사의 기구한 사연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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