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탈출구가 없다
상태바
탈출구가 없다
  • 정영희
  • 승인 2010.05.14 08: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영희∥여수 소호초 교감

지구 반대편 뉴질랜드에서 날아든 기러기 가족의 비보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기러기 아빠가 사회 이슈가 된 건 유행병처럼 번진 조기 영어교육 열풍 때문이라지만 집단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절박함이 무엇이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언제부턴가 기러기는 가족해체현상을 상징하는 해조(害鳥)가 되었다.

옛날 결혼 풍습에 기러기가 등장한다. 동반자에 대한 정절과 평생을 같이하겠다는 뜻으로 신랑이 신부에게 기러기를 가져가는 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철새이지만 오래전부터 우리에게는 친숙한 새였으며, 서쪽 하늘로 V자를 만들며 날아가는 잔잔한 풍경에, 가족애가 유별난 감성적인 동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기러기 가족인가? 무엇이 이들을 집단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 도대체 영어교육이 무엇이기에 채 피지도 못한 자녀들과 함께 동반 자살을 택하게 만든 것일까? 적어도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근본적인 이유를 파헤쳐 볼 일이다. 물론 교육 외적인 일들로 인해 파국을 맞이했을 수도 있다.

무한경쟁에 따른 과도한 집착이 발목을 잡았을 수도 있다. 글로벌 시대를 살아갈 학생들에게는 영어공부는 필수를 넘어서 운명이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치열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온전한 삶보다는 이기기 위한 삶의 방식을 체득하다 보니 원정출산에서부터 초등학생들까지 불법유학이 생겨났다.

얼마 전 타 학교에서 재취학을 신청한 학생들을 면담하면서 이들이 영어공부를 위해 듣지도 못한 아프리카의 한 사회주의 국가에서 부모도 없이 일 년을 공부하다가 왔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영어구사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인증평가 수학(受學)능력은 또래 아이들보다 한 두 학년 정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학력만능주의의 기대치가 높은 한 유학길을 막을 순 없다. 고학력에 따른 보수와 명예가 역전되지 않은 채 왈가왈부하는 현대를 사는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나무랄 순 없다. 그러기에 기를 쓰고 해외로 가방을 메고 나가는 것이다. 맹모삼천지교를 확대 해석한 일부 가진 자들의 행렬을 무분별하게 뒤쫓아 가다 불쌍한 뱁새의 가랑이가 찢어진 것 같아 더욱 아프다.

탈출구가 없다. 부모의 무모한 채찍질이 어디까지 갈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되는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