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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유산의 수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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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화유산의 수호신
  • 안용호
  • 승인 2010.05.2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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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호∥前 광주시교육청 장학담당 장학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또한 자랑할 만한 문화재를 많이 가지고 있던 나라였다. 그러나 그 문화재들은 대부분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임진왜란 등으로 불타고 일제의 수탈로, 도굴꾼들의 밀반출로, 강대국의 약탈로 외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런 수난의 역사 속에서 민족문화유산의 수호신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간송 전형필이다. 간송을 문화재 수집의 세계로 이끈 사람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자 당대 최고의 서화 감식가로 평가받던 위창 오세창이다.

그러나 간송은 어려서부터 외사촌형인 월탄 박종화와 교유하면서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간송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사진을 보도록 하자.

먼저 국보 제 135호이며 광복 후 조선시대 풍속화의 백미로 인정받은 그 유명한 ‘혜원전신첩’을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 1934년 가을에 간송은 일본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쓴 ‘조선의 건축과 예술’에 흑백 도판으로 소개된 신윤복의 풍속화 2점을 발견(?)하게 된다. 보물임을 직감한 간송은 이 화첩이 흘러간 경로를 확인한 뒤 최종 소재지인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골동품상 야마나카 사다지로를 만난다.

5만원에서 시작한 흥정은 밀고 당기는 끝에 3만 원까지 내려갔고, 전형필이 2만 5천 원을 준비해 왔다고 하자 여러 가지를 생각한 주인은 양보한다고 하면서 풍속화첩의 수장을 축하드린다며 물건을 건넨다. 그 값은 요즘 가치로 75억 원 상당의 돈이며 깎은 돈은 기와집 5채 값이었다. 1934년 초 겨울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30점이 담긴 화첩은 이렇게 전형필의 수장품이 되었다.

그러면 국보 제68호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은 어떻게 구입했을까?본래 최우의 묘에서 파낸 매병은 야마모토에서 스즈키로 천원에 넘어갔고, 스즈키는 거간꾼에게 1천 오백 원에 판다. 다시 거간꾼은 신창재에게 4천 원에 팔고, 돈에 쪼들린 신창재는 마에다에게 6천 원에 되판다. 마에다는 ‘천학매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조선총독부에서 1만 원에 팔라고 하는 것을 거절하고, 1935년 간송에게 2만 원에 판다.

기와집 스무 채 값이었다. 무라마키가 한국까지 건너와 4만 원에 팔라고 하는 것을 거절했다? 간송은 골동품이 나타나면 그것이 이 땅에 꼭 남아야 하는 것인지부터 판단했다. 한편의 소설 같다. 1962년 12월에 국보 제70호로 지정되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훈민정음’을 구입한 경로는 정말 아슬아슬하고 천우신조 외에는 별다른 설명을 할 수 없는 경우다. 일제의 수탈이 점점 혹독해지자 지방의 양반집에 전해 내려오던 옛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책들은 그가 운영하는 한남서점으로 몰려들었다.

한남서점을 이용하던 사람 중에는 어문학자 김태준이 있었다. 김태준은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문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김태준은 제자 가운데서도 서예가 이용준을 가장 총애했다. 경북 안동군 와룡면 주하리에 사는 진성이씨 한걸의 셋째 아들로 한학에 밝은 사상적 동지였다. 이 이용준이 훈민정음이 자기 집에 있다고 선생님께 말한 것이다. 1940년 여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처갓집인 광산 김씨 종택 긍구당에서 빌려 온 것이었다.

훈민정음은 김태준에 의해서 전형필에 알려졌고 소유주가 1천원을 요구했으나 전형필은 1만 원을 내놨다. 10배를 더 준 것이다. 덤으로 김태준에게 1천원을 소개비로 주기까지 하였다. 부르는 값이 낮아도 정당한 값을 계산해서 치렀던 간송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 생각된다. 간송은 훈민정음을 손에 넣은 뒤 하도 기뻐서 눈물을 흘리다가는 웃었고, 웃다가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갈 때도 품속에 품었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고 한다.

1956년 통문관에서 학계의 연구를 위해 영인본으로 출판하고 싶다고 하자 흔쾌히 허락하고 손수 한 장 한 장 해체해서 사진을 찍게 했다니 가슴이 뭉클할 뿐이다. 지면관계로 국보 12건, 보물 10건, 지정문화재 4건을 포함 1백여 점을 수장하게 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다 소개할 수는 없다. 선생님이 죽자 후손들은 1966년 봄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했고 간송미술관을 열면서 최완수 선생을 영입했다.

간송미술관은 ‘간송문화’를 5월과 10월에 두 번 발행하는데 여기에 논문을 실으면서 민족문화와 역사의식을 연구 재조명하는 학자들을 ‘간송학파’라고 부른다. 간송미술관은 민족의 얼과 혼을 지키고 널리 알리기 위한 간송정신을 기리기 위해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얼과 혼의 교육을 등한시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문화재를 통한 우리의 얼과 혼 교육을 강화하자. 우리나라는 세계제일의 문화민족이다. 지금까지 우리 것을 무조건 버리고 외국의 껍데기만를 숭상했던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버릴 때가 된 것이다. 우리 것은 보면 볼수록 윤이 나고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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