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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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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
  • 안용호
  • 승인 2011.06.30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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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호∥前 광주시교육청 장학담당 장학관

시제에 가서 우세를 하였다. 노씨 할머니 제각에 ‘추원제’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는데, 조카뻘 되는 분이 나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는데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신후 할아버지 제각인 경지제에 가서는 공자의 ‘인’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는데 또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심히 부끄러웠다. 한글 전용만 부르짖다가 꼭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살아온 것이다.

고민하는 중에 친구가 지금도 늦지 않았다며 서당을 소개시켜 줘서 그 서당에 입학을 하였다. 서당에서는 마침 ‘논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선생님의 논어 설명은 신선했다. 논어는 공자께서 평소에 제자들에게 교육한 내용과 당시의 학자나 정치가들과 대화한 내용을 제자들이 엮은 책이라고 했다. 논어는 학이편에서부터 요왈 편까지 20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글자 수는 1만 1천 750자라고 했다.

학이편 처음,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 해석하면,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라는 대목에서 나는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옛날에 어떻게 이런 위대한 말이 나왔을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원제’라는 말도 ‘신종추원’이라는 말에서 왔는데 ‘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는 집’이라는 뜻이었다. ‘인’에 대하여도 중궁이 ‘인’을 물었을 때 공자는 “문밖에 나아가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큰 손님을 만나듯이 대하라” 하였다.

안연이 ‘인’을 물었을 때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면 인이 된다.” 라고 하였다. 그의 구체적인 조목을 묻는 안연에게 다시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도 말라.”고 하면서 예에 합당하게 하라고 했다. 공자의 가르침은 아주 특이한데 제자의 능력에 따라 다르게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 때 수준별 교육을 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논어는 위기지학으로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고 도야를 하는데 가장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논어는 읽을수록 새로운 맛이 나고 읽을수록 느낌이 다르고 깊은 울림을 준다. 그래서 수많은 다른 해석서가 쏟아져 나오나 보다. 많은 사람이 성리학의 관점에서 논어를 해석하였다. 정약용은 신유학의 관점에서 보았고, 일본의 오규소라이는 정약용보다 한발 앞서간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논어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깊은 뜻이…….

선생님은 사서를 설명하신다며 맹자도 설명하신다. 맹자는 양혜왕으로부터 진심편까지 7편으로 이루어져 있고, 글자 수는 3만 685자라고 한다. 내용은 의리의 변과, 알인욕 존천리의 설과, 인성론, 왕도정치, 호연지기, 구방심 등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논했는데, 인성론을 처음으로 체계있게 설명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절대선이라는 성선설을 제시하셨으니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학의 설명은 나를 더 놀라게 한다. 대학은 옛날 태학에서 사람을 가르치던 법도이니, 유가의 정치 철학서라는 것이다. 나는 평소에 대학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은 삼강령과 팔조목으로 이루어있는데, 삼강령은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이다. 삼강령 중 하나인 ‘명명덕’은 태어날 때 타고난 본성의 밝은 덕이 육체적인 욕망 때문에 오염된 것을 원래의 상태와 같이 밝히어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신민’은 지도자가 자신의 인격을 완성한 후에 온 백성들의 인격도 수양하여 새로운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지어지선’은 온 인류가 모두 지극히 선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대학의 삼대 목표라 한다. 군자의 덕목과 일치하는 느낌을 준다. 팔조목은 삼강령을 실천하기 위한 여덟 가지 조항으로,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평천하’를 말한다.

대학은 어른의 학문이요, 통치자․위정자․지도자의 학문이라 하겠다. 여기에 이르면 학문의 넓고 깊음에 놀라게 된다.중용은 유가의 실천철학서로 매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용이란 이쪽저쪽 치우치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못 미치지도 않는 상태, 즉 언제 어디서나 가장 알맞은 상태로 진선진미의 극치를 중용이라고 한단다. 즉, 중용이란 선의 극치요, 아름다움의 극치를 말하는 것이니 진선진미한 것이 중용이라는 것이다.

세계화로 신자유주의 물결이 밀려오면서 우리는 자아를 상실하고 얼이 빠진 채 방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을 경제에 걸고 국토를 파헤치고 터널을 뚫고 골프장을 만들어 환경파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윤리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인재가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전통적인 윤리 도덕을 일깨우고 우리의 얼을 찾아주는 일은 우리의 당면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2천여 년 동안 동양의 교과서였던,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인 경전에서 다시 답을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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