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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교육을 살리는 인권조례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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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교육을 살리는 인권조례를 기대한다
  • 장병호
  • 승인 2011.08.31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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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호∥중마고등학교 교장

1. 소통과 협력의 교육공동체 구현을 위하여

먼저 전남교육공동체인권조례의 제정을 환영한다. 초안이 나오기까지 애쓰신 분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무엇보다 명칭을 타 시도에서는 ‘학생인권조례’라고 한데 비해, 우리 전라남도는 ‘교육공동체인권조례’라고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동안 타시도의 학생인권조례 제정 소식을 듣고, “학생에게만 인권이 있고 교사에게는 인권이 없느냐?”고 비아냥거림이 섞인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분들이 많았는데 우리 도는 학부모와 교원에 관한 내용을 포함시킴으로써 그와 같은 염려를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우리의 인권조례는 도내의 유치원부터 초중고에 이르는 모든 학교의 학생과 학부모, 교직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안다.

학생은 독립적인 인격체인 만큼 마땅히 교육현장에서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학부모와 교직원의 인권 또한 그 누구로부터도 침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교육공동체인권조례 제정에 따라 학교 교육활동의 전 영역에서 인권이 존중되고, 학생과 학부모, 교직원 모두가 소통과 협력의 원활한 교육공동체를 이루어나갈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2. 자율권 보장이 과연 인권 존중인가?
우리 도의 인권조례안의 구성을 보면 제1장 총칙에서 시작하여 제7장 보칙까지 모두 일곱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조항은 69조에 이른다. 여기서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학생의 권리와 책임을 다룬 제2장의 내용이라 하겠는데, 특히 학생의 ‘권리’ 조항이 주목을 끈다. 이 부분은 학부모나 교원의 권리 내용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조항 수도 총 20개나 된다.

이는 그만큼 학생의 권리 부분이 인권조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학교경영자의 입장에서는 솔직히 여기서 걱정이 앞선다. 앞으로 생활지도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동안 늘 말썽이 되어 왔던 체벌이 금지되고, 복장과 두발, 휴대전화 소지 등 학교현장에서 제한했던 사항들을 대부분 허용하게 되어 있다. 학생들로서는 반가워 할 내용이지만 교육하는 입장에서는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다루기 힘든 아이들을 앞으로 어떻게 이끌고 나갈 것인가. 생활지도가 바탕이 되어야 학습지도도 가능한 일이 아닌가. 인권조례로 인해 앞으로 학생 교육이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힘들어질 것 같다는 것은 나 혼자만의 예감일까. 초중등교육의 대상자는 모두 미성년자들이다. 우리나라 민법은 만 20세 미만인 자를 미성년자로 규정하고 있다. 미성년자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미성숙한 단계에 있으므로 가치관이나 판단력이 충분히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중요한 교육적 사안을 미성년자의 판단과 선택에 맡긴다면 인권조례의 본래 취지가 왜곡되어 자율이 방종으로 흐를 수가 있다. 예컨대, 교육공동체인권조례안 제13조의 “학교의 장은 복장과 두발에 있어서 학생의 개성을 존중하여야 하며, 학생의 두발 길이나 형태를 규제하여서는 아니 된다.”에서는 학생의 복장과 두발에 대해서 아무런 제한을 두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요즘 대부분의 중고등학교에서 교복을 입는다. 그렇지 않아도 짧아지는 교복 치마 문제로 승강이가 벌어져왔는데, 이제 학생들이 ‘개성 존중’을 이유로 교복 착용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복이란 것이 얼마나 종류가 많고 가격이 천차만별인가. 교복이란 학생들에게 일체감과 소속감을 부여함과 동시에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는데, 이제 교복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닌가.

두발도 최소한 학생다운 단정한 모습을 지키도록 권장해왔는데, 이제 파마를 하건 염색을 하건 아무 말도 못 꺼내게 되었다. ‘개성 존중’이라는 미명 아래 보기 흉한 모양새를 하여 주위에 위화감과 불쾌감을 주어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인권조례에 나온대로 하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항의하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제8조의 “학교의 장 및 교원은 학생을 지도할 때 벌로써 학생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아니 된다.”는 조항도 악용될 소지가 많다. 교사가 체벌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안 학생들이 교사의 지도에 불응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수업시간에 분위기를 해치는 학생 가운데 말이 먹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교사가 누차 타이르고 주의를 주어도 듣지 않는다. 따끔하게 혼내줘야 할 시점인데, 인권조례 때문에 신체적 고통을 줄 수가 없다.

내버려두자니 전체의 수업 분위기가 흐트러진다. 교사도 감정의 동물인지라 분통이 터진다. 꾸중을 하면 오히려 인상을 쓰고 욕설을 하며 대든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수업을 진행할 수 있겠는가. 한 아이 때문에 교사가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다보니 결국 나머지 학생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그들의 수업 손실을 어떻게 만회할 것인가. 백 마디의 훈계보다 한 대의 회초리가 더 효과적일 수가 있다. 인권조례에는 ‘사랑의 매’라는 교육력을 발휘할 여지가 없다.

교사의 재량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 허용하여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교사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은 고삐 풀린 망아지들을 울타리도 없이 풀어놓고 맨손으로 관리하라는 것과 같지 않은가. 제10조의 “자율학습, 보충수업, 방과후학교 등 정규교과 이외의 학습활동은 학생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실시되어야 하며, 이를 강요해서는 아니 된다.” 하는 조항도 학교를 어렵게 만들 공산이 크다.

대개 고등학교에서는 대입진학을 위하여 야간자율학습을 실시하고 있다. 학생들을 일찍 집에 보내주면 대부분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 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주고 자기 주도적 학습을 하도록 한다. 이는 대다수의 학부모들이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을 ‘학생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긴다면 제대로 운영되겠는가. 진학이야 나중에 어떻게 되든 우선 편하고 싶은 것이 학생들의 욕구이다. 아마 대부분 정규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교문을 뛰쳐나가고 말 것이다.

방과후학교나 보충수업도 같은 운명일 것이다. 사교육의 수요를 학교 안으로 끌어들여 공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한 취지인데, 학생들의 자율적인 선택에 맡긴다면 결국 학교는 텅 비고, 사교육의 번창만 돕는 꼴이 될 것이다. '마시멜로 이야기'에서 보듯, 달콤한 과자를 나중에 두 개 먹을 수 있다는 보장에도 불구하고 우선 하나만이라도 먼저 먹고 보는 것이 대다수 미성년자들의 특성이다. 이들에게 인권 보장이라는 이름으로 자율권을 준다면 방종으로 흐를 위험성이 크다.

자율권을 보장해주는 것이 과연 인권 존중일까? 더욱이 인권조례를 방패삼아 사사건건 학생의 권리를 주장한다면 교권은 그만큼 위축되고 교사의 사기는 저하될 수밖에 없다. 학생의 인권 보장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교사의 교수활동이 제약을 받는다면 그야말로 더 큰 문제가 아닌가?

3. 인권도 중요하지만 교육은 더 중요하다
학교는 교육을 하는 곳이다. 학교는 교육을 위해서 존재한다. 교육은 인간 행동의 계획적인 변화라고 하였다. 교육은 인간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끄는 일이며, 자연 상태의 인간을 사회적 인간으로 만들어가는 일이다. 바람직한 인간 육성이라는 교육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학생의 권리가 일부분 제한될 수도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인권도 중요하지만 교육이 방향을 잃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교육을 어렵게 하는 인권조례가 아니라 교육을 도와주고 살리는 인권조례가 되어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정치는 국민이 지배자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스스로 굴러가는 것이라고 노자는 말했다. 그렇다면 가장 이상적인 교육은 교육 관련 규정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교육공동체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사항을 인권조례라는 명목으로 구체화시키는 데에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든다. 학교에 인권조례가 필요하다면 앞으로는 가정에도 인권조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정이나 학교나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점은 같지 않은가.

인권조례의 제정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첨예한 몇 부분이 학교경영에 부담을 준다는 이야기이다. 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고 해서 앞으로 학교의 인권 문제가 해결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근거로 더 많은 문제가 야기되고 논란이 심해지지 않을까 싶다. 물론 껍질이 깨어지는 아픔이 없이는 새로운 삶으로 탈바꿈은 불가능하다, 앞으로 일어나게 될 크고 작은 논란은 더 큰 교육발전을 위한 진통으로 감수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되도록 학교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정비되었으면 하는 것이 학교경영자의 소망이다. 학교가 살아야 교육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전라남도교육공동체인권조례가 우리 교육을 촉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만들어져서 학생과 학부모, 교직원의 원활한 교육활동을 위해 윤활유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이 글은 지난 8월 25일 여수에서 개최된 전남교육공동체인권조례 공청회 지정토론회에 발제자로 참석한 장병호 교장의 글을 본지 지면에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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