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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노년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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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노년 빈곤
  • 이기홍
  • 승인 2024.01.06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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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前 목포교육장

1995년 5월부터 약 4년 반 동안 난 도교육청 기획감사담당관실에서 기획담당 장학사로 근무했다. 근무 중 어느 날 의원 요구 자료를 작성하다 관내 교원들의 월급 가압류 상황을 알게 됐다.

너무나도 놀라웠다. 이렇게나 많은 교원들의 급료가 가압류되고 있다는 점에 놀랐고, 그 평화로운 얼굴을 가진 선후배가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나는 전혀 낌새도 알아채지 못했다는 점에 놀랐다.

물론 그 시기가 국가 부도 사태로 아이엠에프(IMF)구제 금융을 받는 때라 더욱 심했지만 그 놀라움은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가압류는 대략 급료의 절반 정도를 떼고 나머지를 주는 방식이었는데 적립된 후 채권자에게 가는 것 같았다. 하도 놀라 평소 격의 없이 지내는 후배를 만나 자초지종을 알아보게 됐다.

너무 막역한 사이라 어쩔 수가 없어 재직증명서를 첨부해 보증을 서주었다는 것, 뒤늦게 아내가 알고 가정이 파탄 날 지경에 놓였다는 것, 다른 사람도 함께 보증을 섰는데 자기에게만 가압류가 들어왔다는 것, 앞으로 다 갚을 때까지는 반 월급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이런 것이 후배의 사연이었다.

나는 기획담당 장학사로서 어떻게 하면 선생님들에게 전문성을 제고시켜 교육력을 높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하루해를 보내다시피 했는데 그동안의 노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장학이 불가능하겠다는 우려를 했고, 여러 방안을 검토했다. 후배의 말 중에서 재직증명서와 아내의 눈물에 꽂혀 묘안을 찾았다.

결국 보증용 재직증명서를 기관장이 발행해 줄 때, 그 조건을 까다롭게 한다면 적어도 어쩔 수 없어 보증을 서주는 일은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학교장이 보증용 재직 증명서를 발행할 때는 보호자나 부부의 동의를 확인하도록 하는 행정지침을 내리면 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관계자들과 숙의를 거친 후 공문서 규정이나 법리적인 검토를 거쳐 절차를 밟아 공문이 발송됐고 당장 시행됐다. 보증을 서주기 위한 재직증명서 발급은 최소화되었으며 자연 급료 가압류는 줄었다. 

교원들의 성향은 비교적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넉넉해 곤경에 처한 경우가 허다하고 이를 해결해 가는 과정 역시 모질지 못해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그래 항상 잘못될 수도 있는 상황을 고려해 일종의 안전장치 같은 것을 해놓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나 역시 냉정해지지 못하는 자신을 믿지 못해 돈 문제만큼은 안전장치를 해 놓고 있다.

재산은 가족 모두의 노력으로 이룩한 것이라 내 명의의 재산을 최소화해놓고 있는데 이것도 안전장치의 일환이라 여기고 있다. 2006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선배 여선생님이 정년을 하는데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겠다는 결제가 올라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어 교감선생님에게 부탁해 연금으로 하시도록 권해 보라고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아니올시다였다. 내가 직접 그 선배분을 찾아가 일부만이라도 연금으로 하시라고 권했으나 결국은 일시불로 결제를 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일이다. 내가 잘 아는  퇴직한 선배분이 어느 숙박업소에서 청소 일을 하고 계신 것을 누가 봤다는 것이었다. 봉사활동으로 노인정이나 요양원에서 청소를 한 선후배님 이야기는 들었으나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한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먹먹했다.

그분은 자녀를 지원하기 위해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으신 바가 있어 더욱 안타까웠다. 지금은 변했지만 정부가 믿음이 덜 가고 일시금으로 받아도 연금보다는 충분히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겠다는 호기와 박사 수준의 계산력에 의지해 내가 퇴직할 무렵까지만 해도 연금과 일시불에서 선택의 갈등이 있었다. 

노년 빈곤, 그것은 어떤 불행보다 무서운 불행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증가하는 의료비와 마주할 노년 빈곤은 공포 그 자체다. 외로움 같은 다른 불행은 노년 빈곤에 비하면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내 주변에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고 드라마 같은 사연을 겪은 뒤 빈털터리가 되어 너무나도 힘들어하시는 분이 있어 내가 다 속을 상하기까지 한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일시금으로 받은 퇴직금이 결국은 자식도 못 살리고 자신도 노년 빈곤에 시달리게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 속에서도 미소가 절로 나오는 일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무시당하던 순둥이 같던 우리의 선배님들은 지금 장기간 근속으로 인해 적지 않는 연금을 받아 안정된 말년을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퇴직 전 받지 못한 대접을 퇴직 후에 받게 되니 세상은 참으로 오묘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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