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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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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 장용열
  • 승인 2016.08.12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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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용열∥교육행정 에디터, 정책분석평가사

올해 8월15일은 광복71주년이 되는 국경일이다. 국경일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을 말한다. 광복절은 이렇게 경사스런 국경일이지만 필자는 기쁘지만은 않다. 1910년 8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그 잃어버린 나라를 찾고자 애쓰신 분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을 때 만주로 넘어와 여기에 근거지를 두고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했던 무명의 독립군 용사 사진 한 장이 있다. 이름이 알려진 애국지사들도 많지만 이 분처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독립군들이 훨씬 많았다.

이분의 모습을 보자. 모자를 보면 겨울 털모자를 썼다. 겨울인 것 같다. 그런데 옷을 보면 여름 홑옷을 입었고 깡마르고 홀쭉한 모습에 배가 고픈지 허리를 질끈 동여 맺다. 다리는 헝겊으로 동여 맺고 발에는 짚신을 신고 있다. 더욱이 잘 먹지도 못해서 핼쑥한 모습이다. 너무나 남루하다. 그러나 이분의 눈을 잘 보면, 눈빛은 조국을 찾겠다는 굳은 의지로 빛나고 있다.

그 당시 독립군이 되기 위해서는 3가지 맹세를 해야 했다. 첫째, 추운 만주벌판에서 굶어죽을 각오가 되어있는가 둘째, 추운 만주벌판에서 얼어죽을 각오가 되어있는가 셋째,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혔을 때 모진 고문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 3가지 맹세를 하지 못한다면 독립군이 될 수 없었다. 또, 그 당시에는 나라를 찾고자 독립운동을 하면 여지없이 죽음을 당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히면 재판도 없이 학살당했고,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군에게 잡히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분도 우리와 같이 고향에 자식들이 있고 사랑하는 부모님과 부인, 형제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추운 만주로 향했던 이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당신의 마음속에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주인된 마음’이 있었다.

내 가슴에도 이런 주인된 마음이 있는지 가르쳐 준 이 사진 한 장에서 자부심을 가져 본다.  100년후인 지금 그때를 뒤돌아 보면서 필자는 다시 한번 묻고 싶어진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독립군의 길을 선택했습니까?”,“무엇을 남기고 싶었습니까?”,“나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다음은 천안 국학원에 세워진 '무명독립군 용사 비문'입니다.

무명 독립군 용사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전후해서 일어난 의병은 민종식, 임병찬, 신돌석 등의 주도 아래 국내에서 독립을 위한 항일전을 벌였다. 그러나 일제가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한 1910년 이후에는 국내에서의 무력항쟁이 불가능하여 독립지사들의 무력항쟁 무대는 서북간도, 연해주 등 국외로 옮겨져 1910년 이후의 항일 무장투쟁은 계속 이어졌다.

그 후 서간도, 북간도 등의 독립운동 기지가 세워지고, 아울러 신흥학교, 대전학교 등이 설립되어 독립군 요원을 양성하였다.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이상설, 이동휘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고 독립군의 무장 항쟁의 터전을 마련했다.

1920년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등에서 커다란 전과를 올린 것도 독립군의 활동 덕분이었다. 독립군의 활동은 1930년대 말까지 이어지다가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충칭에서 광복군을 편성하자 대부분 이에 흡수됐다.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국내는 물론 만주에서, 중국 본토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바친 이름 없는 무명 독립군이 많다. 이들의 숭고한 정신과 위대함은 그 어느 열사, 의사 못지않음을 후손에게 알리고자 무명 독립군 용사비를 세웁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쓰면서 국학원의 ‘민족혼 교육 강의 내용’을 많이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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