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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우리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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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우리의 신부님
  • 정영희
  • 승인 2011.02.0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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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희∥여수 소호초 교감

휴먼다큐의 진수를 보여준 ‘울지마, 톤즈’가 설 연휴 안방을 잔잔한 감동의 물결로 채웠다. 48세를 일기로 선종(善終)한 ‘고 이태석 신부’가 아프리카의 오지 마을 톤즈에서 몸소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이 시대 최고의 다큐영화다.

삶 자체가 너무 감동적이기에 흐르는 눈물을 닦지 못했다는 어느 시청자의 소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는 사제이자, 교육운동가에 의사였다. 슈바이처보다 더 아름다운 삶을 살다간 지고지순(至高至純)한 휴머니스트였기에 더욱 그렇다.

이 한편의 다큐영화에 쏟아지는 찬사가 감히 폭발적이다. 사람들은 왜 이 신부의 삶에 존경은 물론 가슴을 먹먹해 하며 절절해 하는 것일까?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은 헌신적인 봉사가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했을까? 한센병 환자를 위한 치유에서부터 문맹퇴치를 위해 밤새워 가르쳤던 열정까지, 의술을 인술로 끌어안았기에 감동은 배가 되었다.

"왜, 하필이면 아프리카 입니까?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라는 대답에서 그가 얼마나 박애주의(博愛主義)자이며 인본주의(人本主義)자인지 그리고, 자신의 보편적 삶에 대한 통찰이 얼마나 깊었는지 이 영화는 잘 그려내고 있었다.

톤즈 마을 사람들은 이태석 신부를 '쫄리(John Lee)'라고 불렀다. 쫄리 신부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감히 맹목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기에 쫄리 의사였고, 쫄리 선생님이셨으며, 쫄리 아버지였다. 그래서 톤즈 사람들의 쫄리 신부에 대한 그리움과 간절함은 생사를 뛰어넘어도 한참 모자란 느낌이다.

썩어가는 상처보다도 먼저 병든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살을 부비는 의사였으며, 말보다는 실천을 우선하는 행동주의 자였음에 분명하다. 칼끝 같은 냉철한 이성보다는 마음으로 다가가는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였고 음악을 노래하고, 사랑을 전파하는 천사였으니 그가 남기고 간 브라스밴드가 마을 안길을 누비는 모습은 아프리카 수단의 이상(理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짧은 생을 살다간 신부님, 진정 나누고 베푸는 삶이란 무엇인지 온 몸으로 말하려 했던 신부님, 오염된 강에 후회 없이 몸을 던져 톤즈 아이들의 친구가 되었던 신부님, 썩어문드러져 닳아진 한센병 노인의 발등을 어루만지던 신부님, 당신의 온몸에 암세포가 무럭무럭 자랄 때까지 벽돌을 찍어 학교를 지었던 신부님의 고귀한 삶은 후대를 사는 사람들의 영원한 귀감이자 등불인 것이다.

감동이 감동으로 끝나면 별 의미가 없다. 생활 속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학교생활에 어떻게 접목시켜 지도할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고민이 있어야 한다. 한 학년도를 마무리 짓는 2월, 아름답고 숭고한 미래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감상의 기회가 꼭 주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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