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病床) 넋두리

박 관∥교육칼럼니스트

2021-03-27     박 관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는 순간 그 사람은 죄를 짓고 교도소에 갇혀 있는 죄수들과 똑같은 심정이 된다. 큰 수술을 받은 중환자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우선 환복(患服)을 입는것부터 시작해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해야 하는 일과하며 판사가 형량을 선고 할 때까지 조마조마 마음 졸이며 기다리는 재소자들처럼 환자들도 의사들의 치료 소견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며 의사들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흡사 동일하다.

어디 그뿐이랴. 주변의 가족을 비롯한 동료와 친구들에게 많은 걱정과 근심을 안겨주니 이 얼마나 큰 민폐이며 불편한 일인가. 태초에 신들이 인간을 만들 때, 미리 질병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면 그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 창조자이랴.

나에게 주어진 이 질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수용해 가야만 이 난관을 쉬이 헤쳐 나갈 것인지 막막하다. “질병은 신이 내린 벌이다”라는 원시 신앙적 사고(思考)로 얼버무리고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편이 오히려 마음 편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젊고 건강할 때는 삶의 문제를 편안함 속에서만 찾으려고 노력했기에 어려웠고, 인생을 잘되는 길에서만 찾으려고 발버둥 쳤기에 고단했지 않았을까 돌이켜 본다.

인생의 문제를 삶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제를 끌어들여 풀어 갔더라면 더욱 폭넓은 시야로 모든 것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인생의 화복을 잘되는 것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에서부터 바라보았더라면 훨씬 더 폭 넓은 관점에서 풀어 갔을 텐데 말이다. 몸이 아프고 병들었을 때야 비로소 삶의 이치를 제대로 깨달아 간다면 신들이 인간을 만들 때 슬그머니 풀어놓은 질병의 탄생은 오히려 인간들에게 축복이 되는 건가?

그럴 리야 없겠지만 아무튼 아픔과 고통은 인간들에게 성숙되고 원만한 사고를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수술 후에야 천덕꾸러기 방귀가 그렇게 귀한 줄을 알았듯이 아프고 난 후에야 그저 평범한 일상의 생활이 얼마나 귀하고 행복한 일인가를 알게 된다. 우리의 삶은 이렇듯 한 박자씩 늦춰지면서 알게 되고 이어지는가 보다. 

그냥 ‘살아 있음’에 감사할 줄 알고, 그저 숨 쉬고 생각할 줄 아는 생활이 축복임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진정 나이 값을 제대로 셈하는 현명한 사람이리라. 순조롭게 진행되던 병세가 어느 날 갑자기 구토증상이 나타나면서 그동안 먹었던 음식물을 다 토해 내고 말았다. 급히 달려온 의사의 진단은 ‘장마비’란다. 짧게는 2~3일, 길게는 한 달 이상 지나야 만이 잡히는 증상이다.

다시 금식부터 하게 되고 모든 치료방법이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동안의 고통을 알기에 불안이 엄습해 오고 심한 공포가 안겨오면서 여기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마저도 든다. 내가 만약 죽게 된다면 슬픔과 안타까움은 오롯이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고 죽은 자는 오히려 인생의 한 짐을 내려놓고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있지는 않을까? 

80세의 석가님이 제자들에게 “생자필멸(生者必滅)이요,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마지막 설법을 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직시하게 만들어준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런데 죽음 앞에 서면 누구나가 너무 두렵고, 무섭고, 겁나는 것이 문제다.

태어나서 어차피 죽는 것이 인생이라면 당당하기 까지는 못할망정 초연하거나 덤덤하게 맞이할 수는 없는 것일까?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에 죽음과 좀 더 친숙해 져서 그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여유라도 생겼으면 좋겠다. 병실 유리창 너머로도 태양은 여전히 솟아오른다. 오늘도 어김없이 작렬하는 우람하고 찬란한 태양의 모습을 보면서 한결 희망의 기운을 느껴보지만 애타도록 집에만 가고 싶다.

집에 간들 병원에서 보다 더욱 뚜렷하게 병세가 좋아지리라는 보장이 있을 수 없지만은 왠지 집에 가면 모든 병이 다 나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을 어찌하랴. 설혹 죽는 한이 있다 해도 가족들이 옆에 있으면 조금은 안심이 될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지도 모르겠다.

“가정이 곧 천국이다”고 역설한 어느 개똥 철학자의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은 병상의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