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티 자판기와 9시 등교
노영필∥교육평론가·철학박사
"애들아, 애들아!"
"네~!"
"늦잠 잘 수 있으니 수업시간에 졸지 않아도 된단다. 지각도 줄어들테고 쉬어가면서 공부할 수 있지 않겠니."
"헐, 정말요?"
9시 등교가 세간의 화제다. 세상을 앞서가는 의식있는 사람들은 9시 등교 실시는 빠를 수록 좋다는 반응이다. 과연 학부모와 아이들의 생각은 어떤지 몹시 궁금하다.
"잠도 제대로 못자고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사람 사는 행복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주장 앞에 답을 찾는 일은 앞뒤를 따질 것도 없다. 존엄한 방향으로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면 당연한 일 아닌가. 허나 노예제도 유지론자였던 링컨대통령은 현실에서 노예제도폐지론자였듯이 역사를 들여다보면 아이러니한 진실게임이 더 많다.
대표적인 진실게임의 또 다른 예가 있다. 쿼티(QWERTY)자판기 역사다. 아시다시피 오늘날에도 대세를 이루고 있는 쿼티 자판기는 좋은 타자환경을 만들려는 의도로부터 등장한 것이 아니다. 활자공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발휘하여 타이핑속도를 최대한 늦추도록 고안된 것이다. 가장 많이 쓰이는 글자들을 자판의 각 줄에 두루 흩어 놓았고, 주로 왼쪽에 배열해 쿼티 자판기라는 악명높은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조기등교는 쿼티 자판기와 같은 역사일지도 모른다. 수요자들의 입맛대로 등장한 제도였다. 즉 사교육비 절감, 부모들의 물리적인 환경개선을 덜어준다는 선량의 취지에서 도입된 것이다. 지금도 공부 잘 하는 대다수의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원하는 정책이다. 실력지상주의인 지금, 너댓시간 자고 꼼꼼히 자기 관리를 하는 아이들은 9시 등교를 반대한다.
지난 6,4 지방선거 때 '아침을 챙겨주는 교육'을 책임지겠다고 외치는 후보가 떠오른다. 쿼티자판기 논리를 잘못 읽어내 떨어진 것은 아닐까? 삶의 가치를 더 높이려면 이론의 여지가 없이 등교시간을 늦출 수록 좋다. 존엄한 아이들의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학교에서 아침까지 챙겨주는 일은 어쩐지 어색하다.
생각보다 조기등교를 원하는 사람들이 만만치 않게 많다. 쫓기는 삶인 줄 아는데도 긴장을 늦출 수 없어 스스로 옥죄는 모양새다. 여유를 가지고 쉴 수 있는 권리를 세상이 조직적으로 박탈한 현실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잠을 못자게 하는 것은 성장기 고통, 아니 고문일텐데도 경쟁에서 밀릴 수 없다는 것이다. 늘 OECD 선진국대열이라지만 창피한 대목이다.
과연 이런 가치판단 앞에 선 어른들은 괜찮을까? 부모들 입장에선 조기 등교문제는 달디 단 곶감같은 문제다. 곶감처럼 빼먹기 좋아 학교가 감당하는 현실이니 편하긴하다. "기숙사에 넣었더니 이렇게 편한 세상을" 하던 부모들의 반응을 들은 적이 있다. 이를 살려 기숙사를 짓고 학교로 학교로 아이들을 불러들였다. 그것이 교육이 쫓아가야할 신기루일까?
속도가 빠르고 덜 힘들도록 쿼티 자판기를 개선해의 보려했지만 이미 불가능한 상태였다. 학부모 출근문제, 학력저하, 청소년 일탈, 사교육조장으로 걱정하는 마음은 공감된다. 현실적으로 대두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과 섞여 설득이 아니라 쿼티같은 저항이 더 크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칫 9시등교정책도 쿼티 입장에서 보면 불합리한 명분이 대세를 이룰 수 밖에 없다. 학교의 주도권은 공부 잘 하는 쪽이다. 교육청에서 기존 관성에 맞서야 하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광주교육의 실력이냐 혁신이냐의 딜레마가 또다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조기등교는 돌이키기에는 너무 많은 입시 상황들과 맞물려 정착된 제도여서다.
현행, 일사분란한 대입제도가 혁신적으로 개선되지 않고는 꿈쩍 않을 것이다. 그래서 교육청의 9시 등교정책은 불리한 추진이 될 수밖에 없다. 건강권 보호를 비롯하여 명분으로도 맞지만 쿼티힘을 넘어서지 못할 가능성이 너무 크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PISA의 데이터를 보면 안다. 대한민국의 학교는 유래없이 많은 시간을 교육에 투자하고도 고등학년이 될 수록 학력이 떨어지는 나라 아닌가. 과연 조기등교는 성적과 인성이 다 보존될 수 있는 방법인가, 어찌하지 못하는 사회적 무책임을 학교에 전가시키고 학교만 버겁게 감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학부모들은 의도가 나쁜 조기 등교로 보지 않고 학교의 선량한 은혜라면서 필요선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