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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앞에 홀로 선 단독자' 키르케고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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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앞에 홀로 선 단독자' 키르케고르(2)
  • 강성률
  • 승인 2021.09.28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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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성률 교수의 철학 이야기(46)

여덟 살에 학교에 들어간 키르케고르는 비록 몸이 허약하긴 했으나 대단히 머리가 좋았다. 그러나 별로 말이 없었을 뿐 아니라 친구를 사귀지도 않았다. 열일곱 살에는 코펜하겐 대학 신학과에 입학했고 문학과 철학 쪽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는 아예 공부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거리를 배회하거나 극장, 다방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국가 신학고시도 포기했다. 유산을 상속받았으나 불려나가기는커녕 제대로 보존하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물려받은 집에서 기거하며 저녁이면 언제나 시내 중심가를 산책하곤 했는데, 이때 골목의 장난꾸러기들이 뒤를 따라다니면서 기묘한 옷차림을 한 그를 웃음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키르케고르는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책을 쓴다. 그러나 책을 내면서도 본명을 숨기고 가명이나 익명을 사용했다.

또 당시 사람들의 평범한 지성을 공격했기 때문에 수많은 반대자를 갖게 된다. 그들은 키르케고르를 악의에 가득 찬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풍자적인 신문에 등장시켰다. 그의 이상한 옷차림과 가는 다리, 기형적인 척추에 맞춘 짝짝이 바짓가랑이 등이 그려지는가 하면 그가 애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모습도 등장했다.

처음에 그는 이에 맞서 분연히 싸웠으나 대중들은 그를 백안시했다. 이 일로 인해 키르케고르는 몹시 상처를 받았다. 그는 한편으로 조롱받는 일이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기꺼이 ‘조롱받는 순교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평생토록 가면을 쓰고 있었고, 세상 사람들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했다. 

키르케고르는 기독교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국가교회에 공격을 가하는 내용의 저서를 출판하였다. 그러던 중 당시 교회의 수문장 격인 뮨스터가 세상을 떠나자 마르텐젠 교수가 그를 ‘진리의 증인’ 이라고 찬양했다. 그러자 키르케고르는 이에 반박하는 내용의 항의문을 신문지상에 기고했다. 이로 인해 생긴 그와 국가교회 사이의 격렬한 논쟁은 반년이 넘도록 계속됐다.

그는 끝까지 싸우다가 모든 재산과 에너지를 소모하고 말았다. 1855년 10월 20일, 그는 길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한 달 후에 세상 사람들의 오해와 비웃음 속에서 고독한 ‘단독자’로서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이때 그의 나이는 마흔 둘이었다. 그는 병원에 있는 동안 누이와 매부, 그리고 조카들이 병실에 들어오는 것은 환영했다.

하지만 불화로 발을 끊고 살았던 목사 형은 끝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목사이자 친구인 베에젠의 출입은 환영했으나 그가 베풀려고 했던 예배는 또한 거절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폭탄은 터져서 주위에 불을 지른다”고 말했다. 그의 저서는 그가 사망한 지 오십 년 후까지도 별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다가 1909년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최초의 전집이 간행됐고 이때부터 그의 글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키르케고르(1813년-1855년)는 덴마크의 종교사상가이자 실존주의의 선구자이다. 그에 의하면 헤겔의 변증법적인 이론은 대립의 해소를 말하지만 그것은 사변적인 관념의 세계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의 세계에서는 항상 양자택일(兩者擇一)을 위한 냉혹한 결단만이 요구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해당되는 주체적 진리가 참되다. 내 인생의 주체는 나 자신이고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자기 생성해가는 단계를 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으로 나누고 마지막 세 번째 단계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변증법적인 싸움을 통해 비로소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광주교대 명예교수·철학박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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