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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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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장천!
  • 이기홍
  • 승인 2021.09.2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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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前 목포교육장

60여 년 전, 나는 영암군 서호면에 자리한 장천초교에 입학했다. 어린 국민이 처음으로 국가를 만난 것이다. 내게 다가온 국가는 참으로 위대했다. 비록 월사금을 받기는 했지만 네모반듯한 교실에서 책걸상은 없어도 훌륭한 선생님께 공부할 수 있게 해 줬다. 때론 우윳가루, 옥수수 가루도 나눠줬고, 구호품도 선물했다. 

많은 동무들과 함께 먼 길을 등하교 했다. 도갑사까지 걸어서 소풍도 갔다. 간대바위에도, 성재리 부두에도 갔다. 선생님은 신비함 그 자체였다. 변소에도 안갈 것 같은 선생님은 우리들의 하늘이었다. 선생님이 웃으면 교실이 웃고 선생님이 화내면 운동장도 조용했다. 지금도 그 선생님들이 생각난다.

담임이었던 조병덕, 나남균, 최정균, 노정남, 김백원 선생님, 담임은 아니었지만 가르침을 주었던 전종만, 노동인, 박철현, 박준재, 문관용, 차석주 선생님. 은적산에서 물방아 골을 돌아 장천·엄길로 흘러가는 시냇가에서 송사리도 잡고, 조개도 줍고, 조약돌도 만지작거렸다. 도리정의 보리밭, 엄길의 검바위, 반남박씨 선산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산소를 지나 방죽으로 가는 길, 그 때는 고개였다. 장복골에서 상구정으로 넘어가는 길은 소 멍에처럼 길고도 길었다. 논둑길은 자운영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띄엄띄엄 미나리아재비가 난 곳에서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난 뱀은 나를 자꾸만 놀라게 했다. 그리고 쇠악 바위는 비만 오면 누런 눈물을 흘리고 큰 소리로 울었다. 

그 유년 시절, 난 돌담이나 울타리로 연결되는 고샅길을 죽마를 타고 많이도 쏘다녔다. 쐐기가 많은 고목 감나무 밑에서 감똑을 주워 팔찌며 목걸이도 만들어 걸었다. 초가을 해질녘 드넓은 마당 하늘을 야트막하게 가득 메우는 고추잠자리를 만져보기 위해 온 천지를 날고뛰다, 어둠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그 많고 많던 붉은 잠자리를 찾느라 남새밭 울타리를 더듬기도 했다.

겨울이면 윗목에 대발로 엮은 어리 통에 담겨진 고구마를 하나 둘 빼 먹다 썩기 직전의 고구마가 향기도 그만이고 가장 맛도 좋다는 것을 터득하기도 했다. 마루 밑 닭장에서 주운 달걀을 소죽 속에 쪄먹으며 착하게 생긴 암소와 마주 앉아 눈빛을 교환하고, 워낭소리 나눠 들으며 깻대의 따뜻한 불빛을 함께 쪼이기도 했다. 

내가 교직에 발을 딛던 4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남도의 처처에는 장천과 같은 학교가 있었고 아이들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 학교를 매개로 지역의 문화가 꽃피었다. 조그만 교무실에서는 종소리가 교실을 드나들고, 큰 나무 아래서는 예쁜 여선생님이 시원하고 맑은 바람을 치맛자락으로 받으며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가르쳐주고, 동네와 학교를 구분지어 주는 울타리에서는 닭들이 발톱으로 흙을 헤치며 먹이를 쪼아 먹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 마을이 있는 곳이면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런 그리운 모습들은 TV 화면에서나 찾을 수 있을까,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유독 남도의 경우에는 이러한 사건들이 한꺼번에 일어났고, 그에 따른 충격 또한 컸다.

자운영 꽃 핀 들녘에서, 해 저무는 바닷가에서, 또한 산딸기 흐드러진 산기슭에서 약속이나 하듯 몇 년 사이에 뚝 그쳐 버린 것이다. 그런데 내 모교 장천이 비록 초·중 통합학교일지라도 아직도 건재하고 후배가 대를 이어 자라고 있으니 어찌 놀랍고 고맙지 않겠는가. 

교육이란 누가 뭐래도 오늘의 희망을 내일의 현실로 바꾸는 작업이다. 나는 내 고향 내 후배들이 가난한 집 숭늉에 떠오르는 옹골찬 밥알처럼 야무진 꿈을 꾸기 바란다. 그리고 그 꿈을 땀으로 흠뻑 적셔내기를 조언하며, 후배들의 꿈이 익어가기를 소망한다. 플라타너스 그늘이 유난히도 시원했던 장천에서 나의 모든 것은 결정되었다.

자랑스럽지는 못하지만 부끄럽지는 않은 나의 삶을 잉태해준 60여 년 전 장천, 어찌 꿈엔들 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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