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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딸 결혼식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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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딸 결혼식 날
  • 구신서
  • 승인 2021.09.04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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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신서∥전남대 박승희 열사 장학재단 이사장

큰 딸, 이 의미는 나의 첫아이가 딸이라는 뜻이다. 첫 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취해야 할 방법을 배우거나 체험해보지 못한 채 성장하다 보니 나름대로 힘들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언니를 보고 크는 둘째인 딸과 두 누나를 보고 큰 셋째인 아들은 나를 대하는 방식과 관계설정이 다르다. 첫딸이어서 나하고는 다른 성별의 인간이니 이쁘기만 하였지만 내게는 아비 되는 실험의 대상이 아녔나 싶다. 자식으로 성장하는 서툼과 아비로 나이 먹는 나의 서툼이 지금 의 부녀 관계를 형성했으리란 생각이다.

나의 서툼은 과도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 성장수준에 소화시킬 수도 없는 것들을 보여주고 주입시키려 하는 것, 기대에 못 미친다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 내가 가르치는 애들과 비교해서 판단하는 것, 서로의 대화법에 서툴러 부부싸움 방식으로 대처하는 것 등 부지기수이다. 

이제 그 큰딸이 결혼을 했다. 딸이 데려온 결혼 대상이 “인간인 한국남자”여서 다행이다. 혼기가 차도 결혼하지 않거나 못하는 세태, 결혼해도 아이 낳기를 선택적으로 하는 흐름들이 지금이다. 비혼 선언을 하고 종이 다른 개나 고양이하고 이종가정을 이루기도 한다.

같은 성별끼리  사랑하여 동성끼리 가정을 이루는 경우를 보면 사고의 진보성 여부를 떠나서 애비 입장에서는 다행이다. 내가 많이 싫어하는 나라 놈을 데려와 다문화 가정을 이루는 외국의 남자가 아닌 한국 놈이다. 생각의 문제, 종교, 정치의 문제, 삶을 대하는 자세의 문제 등은 이후에 따져보고 고쳐 가면 될 일이다.  

사위
내가 보기에 딸의 혼기는 상당히 늦었다. 주변에서 요즘 세태에 비추어 아직 늦지 않았다 하는 말들에 위안을 찾지만 결혼한다는 딸의 남자는 딸보다 더 늙었으니 그 위안도 그리 다가오지는 않는다. 사위는 백년지객(百年之客)이라 한다. 장인, 장모의 입장에서 사위에 대한 정이 자식에 못지않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사위도 때로 처가의 자식노릇도 할 때도 있다”라는 기대에서 비롯된 말일게다.

딸과 사위가 결혼을 하는 것은 그동안 서로에 사랑에 대해서 확인의 과정을 거쳐서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결혼식, 그리고 법적인 절차를 거쳐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과정이란 생각이 든다. 흔히 사위사랑은 장모가,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가 더한다고 한다. 내 마나님은 “큰딸의 남자여서 그런지 듬직하고 큰 아들을 얻은듯하다”고 벌써 마음을 굳힌듯하다.

내 입장에서 사위는 나와 충분한 시간을 공유한 것이 아니다. 더더구나 마음을 확인한 절차도 없었다. 오늘 이후로 장인과 사위의 관계로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법적 관계가 선언이 되어버린 형국이다. 선언 이후에 마음과 서로의 관계를 확인해가고 만들어가야 하는 역전의 상황이다. 이미 장인, 사위 옹서간(翁壻間)의 사이가 된 선배들은 어떻게 이 상황을 정리해 가는지 궁금하다.

“아무리 좋은 사위라도 첫딸의 사위는 장인에게 탐탁지 않다”라는 경험들이 내게는 더 크게 다가온다. 첫딸의 성장과정이 실험대상 이었지만 이후 사위와의 관계에서 실험의 빈도를 줄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도 시작
물같이 바람같이 흐르는 세월의 한 길모퉁인 오늘이지만 나에게는 또 다른 낮선 삶의 길의 시작이다. 시작을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알지 모르는 곳에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 인생인 듯하다. 나 또한 그리 삶을 보낸 듯하다. 해야 할 때 하지 못하고 가지 말았어야 할 길들을 건넜다. 어찌 보면 그 모든 길들은 내가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그 선택들을 지나 온 흔적들이 나의 삶이지만 아직도 한번쯤은 다시 가고픈 길도 있고, 일상처럼 그리운 길도 있다. 나 혼자 말 한마디 못하고 가슴의 세월을 보낸 것도 있다. 세상에 대한 기대와 배신도 알아오면서 살아온 삶이었다.

그동안 아무것도 없는 땅에 씨앗을 뿌려온 느낌이었지만 언젠가는 싹이 트고 열매가 맺을 것을 기대해 왔다. 어떤 것은 이루고 많은 것은 아쉽지만 이제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을 나서는 느낌이다. 첫딸의 결혼은 나의 삶의 하나의 열매다. 일정부분은 내가 선택한 시작이다. 

세상의, 그리고 나의 딸과 사위에게 
어제 뜨는 해와 오늘 뜨는 해가 다르지 않지만 시간의 변화가 이루는 양적인 변화에서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날이다. 오늘 이 새로운 날을 삶속에서 늘 기억하고 매해 새로운 시작들을 만드는 날들로 기억하기 바란다. 내 삶의 아쉬움과 그대들의 삶에 대한 기대를 담아 몇 가지를 말한다. 

먼저, 내가 지나온 시간은 막 아쉬운 날들이고, 그대들의 갈 길은 먼 길이다. 일상을 함께 결정하고 공유하는 것이 그 길을 나서는 첫 방법이다. 내가 지나온 길은 많지만 내게 다 보인다. 그 보이는 길들이 돌아보면 아쉽고 다 아쉬운 길들이었다. 갈 길이 더 먼 그대들의 앞길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게다. 손 꼭 잡고 하루의 길을 소중하게 가라. 내가 걸어 왔던 길들을 막았던 산과 강이 그대들에게는 그냥 길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둘째,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나아가길 바란다. 당당함은 실력을 갖추는 것, 법이나 도덕적으로 부끄러움이 없는 것, 조직이나 타인으로부터 지탄을 받지 않을 때 당당한 삶이 이루어진다.  그대들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노동과 삶이 일치하는 소중한 직분인 교사로서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가르침에 거침이 없는 것, 아이들로부터 지지 받는 일이 최우선이어야 할 것이다. 부당함에 대해 저항하고 단호할 때 당당하다. 그래야 교단은 정의롭게 지켜진다.

셋째, 혹 일상에서 작은 패배, 작은 이익, 작은 손실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망설이고 두려워하지 마라. 그런 일들에 타협하는 우를 범하지 마라. 늘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라. 둘이가 일상을 보내는 ‘사람의 숲속’에서 끝까지 가라.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아도, 누구하나 밀어주지 않아도 언 땅에서 겨울을 살더라도 다시 일어서면 새로워진 새벽을 맞이할 꺼다. 새벽은 새벽에 눈뜬 자나 새벽까지 지켜야 만이 볼 수 있다. 

넷째, 혼자 놀지 마라. 혼자 우는 눈물 맛에 취하지 마라. 살아오면서 상처하나 보이기 싫은 흉하나 없으랴? 앞으로 살면서 생기는 상처들 또한 몸과 맘 곳곳에 흉터로 남을진대, 적어도 서로에게 주는 상처는 없어야 한다. 다친 것들을 서로에게 보이고 서로를 치유하길 빈다. 서로의 가슴을 비우게 하지마라. 빈 가슴이 시리디 시려 찬바람이 일게 하지 않아야 한다.

가슴 떨리지 않고 익어가는 사랑 없듯이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 없다. 성장하고 변화하는 모든 것들은 흔들리며 나아간다. 어떤 사람들에게 용공이 되어도 그대들에게는 내 사랑이다. 상처가 흉터로, 더 이상 치유할 수 없는 옹이로 박혀있지 않기를, 태풍 지나간 가을 하늘이 아름다운지를 알기를 바랄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애비는 그대들의 결혼, 그 시작을 세상의 그 누구보다 뜨겁게 응원하는 동지임을 잊지 마라. 이 출발의 길에, 우뚝 선 큰 산에 대고, 늘 푸른 저 바다에 대고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소리로 서로 사랑한다고 외치 거라. 달이건 해건 떠오르게 하여 내게 안겨주라.          

(2021년 9월4일 토 13:00 목포 좋은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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