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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tes)형
  • 나동주
  • 승인 2021.09.01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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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동주∥前 영광교육장
나동주 전 영광교육장.

소크라테스(Socrates)는 기원전 470년에 태어나 기원전 399년에 정의롭지 못한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한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입니다. 그는 70년이라는 생애를 살면서 끊임없이 말하였으나 결코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말하였을 뿐, 쓰지 않았으므로 그의 저술(著述)은 애초부터 있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가 많은 것을 말하고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가 가르친 내용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소위 ‘놀라운 어둠’속에 그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Platon)이 그의 저서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어떤 성품의 사람인지,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며, 어디서부터 플라톤의 말인지 구별해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과제로써 철학자들은 이를 ‘소크라테스의 문제’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외모는 대머리에, 두 눈이 돌출되고, 코가 주저앉은, 형편없는 추남(醜男)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나이 50세가 되도록 결혼도 못하는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추남에다가 가족을 부양할 능력조차 없는 그는 사실상 결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20세의 꽃다운 나이의 크산티페(Xanthippe)는 철학자로 유명한 것 외에는 별달리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노총각 소크라테스와 결혼에 이르게 됩니다. 무려 30살의 나이 차이였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크산티페 사이에는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달콤한 환상이라면, 결혼은 혹독한 현실이었습니다. 부인과 세 아들을 내팽개쳐두고 오가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묻고 대화하며, 이런저런 이야기에만 몰두한 소크라테스는 빵 대신 헛된 명성만 가지고 집에 돌아오는 철저하게 무능력한 가장(家長)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산티페는 변함없이 소크라테스를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사실 그녀는 천재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있게 한 소리 없이 강한 여자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라에서 인정하는 신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을 끌어들이는 죄를 지었으며, 또한 청년들을 타락시키는 과오를 범했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선고 이유는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의 제도를 비웃었으며, 도시의 통치자들을 제비뽑기로 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으며, 그런 주장은 젊은이들이 기존의 제도를 멸시하게 하고 그들의 폭력성을 자극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형량을 경감시킬 수 있는 어떠한 행동이나 변호도 원치 않았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올곧은 철학자의 지조(志操)가 섬뜩하리만큼 무섭게 다가옵니다. 결국 281명의 찬성과 220명의 반대로 사형이 언도(言渡)됩니다. 소크라테스는 당근즙에 섞은 독을 태연하게 마시며 기원전 399년 4월 27일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나이 70세였고, 크산티페의 나이 40세였습니다. 

이렇듯 불세출(不世出)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뜬금없이 ‘테스형’으로 환생(還生)하여 최근 우리 곁으로 소환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세상이 왜 이리 힘들어?”, “사랑이 왜 이리 힘들어?”, “세월은 왜 이리 아픈가요?”, “먼저 가보니 천국은 있던가요?”

작금(昨今)에 유리알처럼 투명한 사회적 사실이 매몰되고, 왜곡된 사회적 현상만이 집중 조명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목도(目睹)하며, 이제 필자가 묻습니다. 

테스형!

지금 우리 정의롭게 살고 있는가요?
저마다의 가면을 벗어도 우리 당당한가요?
법과 원칙이 우리 삶의 기준인가요?
공정과 상식이 공정하고 상식적인가요?
진실이 거짓에 희롱 당하고, 정의가 불의에 매장 당하는 현실이 과연 옳은가요?
후안무치(厚顔無恥), 배은망덕(背恩忘德)이 난무하는 이 세상은 누구의 세상입니까?

아, 테스형!
먼저 가보니 지옥은 있던가요? 

‘테스형’ 노랫가락 절절한 시골의 허름한 전파사 앞에서 무직(無職)으로 살아온 지난 1년 6개월의 삶을 반추합니다. 갈바람 불어 가을은 왔으나 질곡의 현대사를 숙명처럼 보듬고 살아가는 우리는 아직도 동토(凍土)의 백성입니다.

아프게 성찰하고 처절하게 모색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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