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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民生)을 챙기는 원님' 토정 이지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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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民生)을 챙기는 원님' 토정 이지함(1)
  • 강성률
  • 승인 2021.08.19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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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교수의 철학이야기(43)

조선 중기 때의 학자이자 기인(奇人)인 이지함은 그의 호를 딴 '토정비결'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그가 전설적 인물인지 실재 인물인지조차 분명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현령(종5품의 지방관직, 오늘날의 군수 격)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조카 가운데 영의정과 이조판서가 나오기도 한 양반 중의 양반 한산 이씨의 명문 출신이었다.본래는 보령(충남) 출신이지만 서울에 와 글공부를 했으며, 너무 열심히 공부해 주변사람들이 몸이 상할까 걱정해 등불기름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도끼를 들고 관솔을 따다가 불을 피워 놓고 자욱한 연기 속에서도 밤을 새워 글을 읽었다고 한다. 그 결과로 모든 방면에 통달하게 됐는데 이상스럽게 과거공부는 통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성화를 부리면 마지못해 과거장에 나가서는 글을 짓지 않고 나와 버리거나 또 지어놓고 내지 않기도 했다.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물으면 “사람마다 제각기 좋아하는 바가 있소. 나는 내 좋은 대로 살 것이외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공부를 마친 그는 지팡이 하나를 짚고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가끔 서울에 와서는 율곡 등 당대의 명사들과 사귀었다. 좌중을 웃기는 농담을 잘했고, 익살 섞인 직언을 서슴지 않는 자유자재의 풍류가 있어 율곡으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 

이지함은 기개가 늠름하고 위풍이 당당했다. 여기에 수련을 쌓음으로써 복중(伏中)에도 물을 마시지 않았으며, 엄동설한에도 홑옷으로 지내는 등 능히 한서기갈(寒暑飢渴)을 이겨내는 능력이 있었다. 한 번은 개성의 송악산 밑 화담으로 서경덕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화담 옆에 방을 얻어 제대로 학문을 익히고자 했는데 어느 날 그의 집주인이 장사를 나간 틈을 타 그 아내가 방에까지 들어왔다.

이지함의 기골에 홀딱 반한 그녀는 온갖 아양을 떨며 교태를 부렸다. 처음에는 점잖게 그 부인을 달래다가 그래도 교태를 멈추지 않자 인륜을 따져 그 요부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집 안에 들어선 집주인이 문틈을 통해 이런 모습을 낱낱이 보고 말았다. 그(집주인)는 한걸음에 서경덕에게 달려갔고 화담도 끌려와 이 장면을 목격했다.

다음날 서경덕은 이지함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학업은 내가 가르치지 않아도 되겠네. 돌아가게.” 이지함의 학덕은 당대에 으뜸가는 스승에게까지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그의 이름은 임금에게까지 알려졌고 나라에서는 그에게 포천 현감(종6품관)의 벼슬을 내렸다. 대단한 특혜였음에도 그는 한참이나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부임했다.

부임할 적 그의 모습은 베옷에 짚신 차림이었다. 저녁때가 돼 그럴듯하게 밥상이 차려져 내왔다. 그러나 새 원님은 멀거니 밥상을 내려다보다가 먹을 것이 없다며 상을 밀어냈다. 이에 사령이 더 푸지게 밥상을 차려왔다. 그런데도 또 이렇게 말했다. “먹을 것이 없구나!” 밥상을 맡은 구실아치가 잘못된 죄를 청하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민생이 어려운에도 모두 앉아 잘도 먹고 있구나” 그러고는 잡곡밥과 나물국 한 그릇씩만 가져오게 해 맛있게 먹었다. 그는 물고기를 잡아 고을 경비에 보태 쓰겠노라고 하고는 조정에 그물이나 발 같은 것을 보내달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해주지 않았다. 이에 그는 원님자리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광주교대 명예교수·철학박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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