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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육이 만든 조선의 대학자' 이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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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육이 만든 조선의 대학자' 이 황
  • 강성률
  • 승인 2021.07.29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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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교수의 철학이야기(42)

이황의 호는 퇴계(退溪)이며 지금의 경상도 안동군 도산면 온혜동 사람이다. 그의 증조 이정이 선산부사를 지냈고 조부 이양과 부친이 진사였음을 보면, 비록 고관 대작을 지낸 명문은 아니지만 그의 집안도 양반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3남 1녀를 남긴 채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재혼해 4형제를 얻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그러자 당시 서른 두 살이었던 퇴계의 어머니는 농사와 길쌈 등으로 7남 1녀의 대가족을 부양했다.

그녀는 혼자 힘으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면서 자식들의 교육에도 정성을 쏟았다. 그의 어머니는 항상 “글이나 외고 짓는 것에만 힘쓸 것이 아니라, 특히 몸가짐과 행동을 성실하게 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과부의 자식들에 대해 가정교육이 부족해 버릇이 없다고 비난하는 법이니, 너희들은 남보다 백 배 이상 노력해서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퇴계는 여섯 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나서 문 밖에서 전날 배운 것을 외워본 다음에 들어가 공부했다고 한다. 열두 살 때에는 숙부인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웠다. 숙부는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한 사람으로 비록 병중에라도 책을 손에서 놓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문장과 시에 능했는데 조카들을 친자식과 같이 돌봐 주었다. 이 무렵 퇴계는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서 소란을 피울지라도 벽을 바라보고 앉아 책을 읽거나 사색에 잠겼다고 한다. 그의 집에는 많은 장서가 있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큰 부인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죽자 “서책은 글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사사로이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요. 글을 좋아하는 선비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퇴계의 아버지에게 기증했다.

퇴계의 아버지는 생전에 자제들을 훈계하며 “나는 밥 먹을 때에도 책이요, 잠잘 때에도 책이요, 앉으면 같이 앉고 가면 같이 가서 어느 때나 책을 품에서 뗀 일이 없다. 너희들도 이와 같이 하여라. 부질없는 날을 보낸다면 어찌 소망이 이뤄지겠느냐”고 말했다.

퇴계는 열아홉 살에는 '성리대전'의 일부를 읽었으며, 이듬해에는 '주역'을 읽었다. 이때 침식을 잊어가며 독서와 사색에 매진한 결과 너무 무리해서 소화불량증을 얻어 내내 고생했다. 특히 고기만 먹으면 체했으므로 언제나 야채를 즐겼다고 한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독서에 열중했다.

하루 내내 꼿꼿이 앉아 책을 읽었고, 머리가 아프면 꽃들을 보면서 시를 지었으며 또 그 해답을 얻기 위해 사색에 잠겼다. 그가 어릴 적부터 이런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여느 사람들은 그를 파리한 샌님이나 혹은 아주 근엄한 스승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가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든지 술을 지나치게 마시지 않았다든지, 또 놀이에 지나치게 빠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는 한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결코 단조롭지도 않았고, 또 본능을 지나치게 억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학문에 몰두할 적에는 천둥이 치는지 벼락이 치는지, 마당에 널어놓은 나락이 떠내려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퇴계의 도학 공부는 유생들의 조소를 받게 됐다.

그러나 퇴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스물네 살에는 과거에 응시했지만 세 차례 연거푸 낙방했다. 그 후 노력을 경주해 삼 년 후에는 진사시에 수석을 차지했고, 생원시에 차석으로 합격했다.

[광주교대 명예교수·철학박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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