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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개의 서까래와 한 개의 대들보' 원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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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개의 서까래와 한 개의 대들보' 원효(2)  
  • 강성률
  • 승인 2021.04.0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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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교수의 철학 이야기(33)

원효는 결혼 2주 만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 불자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광대들이 표주박(작고 둥근 박을 둘로 쪼개 만든 바가지)을 가지고 춤추는 것을 구경했다. 이때 그의 머릿속에는 ‘아! 바로 저것이다. 저것으로 불교의 어려운 이론을 대중들에게 전하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광대와 같은 복장을 하고 표주박을 두드리면서 화엄경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불렀다.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 큰길 위를 걷기도 하고, 거지들과 한데 어울려 잠을 자기도 하며, 귀족들 틈에 끼여 기담(기묘한 이야기)으로 날을 새웠다.

때로는 깊은 산중의 암자에서 꼼짝하지 않고 좌선(坐禪)으로 지낼 때도 있었으며 무애당(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위치.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으로 유명한 분황사에 딸려있는 방)에서 홀로 밤을 새우며 책 쓰는 일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 때문에 다른 승려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그러던 중에 왕이 불교의 경전인 '인왕경'(왕에게 설교하는 내용이 들어 있음)의 해설을 듣기 위해 전국의 고승들을 불러들였는데, 이때 원효도 추천됐다.

그러나 승려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그 자리에 끼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왕이 당나라로부터 새로 불경 '금강 삼매경'을 구했는데, 그 해설을 듣고 싶어 대규모의 법회를 열도록 명했다. 그러나 그 불경은 대단히 해석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이를 강의할 인물을 찾아낼 수 없었다. 이때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대안법사가 천거됐는데 그는 극력 사양하며 “이것을 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원효밖에 없습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초개사(경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원효가 자기 집을 헐어 세움)에 묻혀 있던 원효는 왕이 보낸 사신을 따라 나섰다. 그는 소를 타고 가면서 양쪽 뿔 사이에 벼루를 놓고 붓을 들어 강론할 '금강 삼매경'을 풀이했다. 그런데 이 다섯 권으로 된 책을 누군가가 훔쳐가고 말았다. 원효는 하는 수없이 왕에게 아뢰어 사흘을 더 연기하고는 다시 세 권으로 소(疏-임금에게 올리는 글)를 지었다. 이것이 바로 '금강 삼매경론'이다.

왕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과 전국의 명망 높은 스님들 앞에서 원효는 강해를 시작했다. 그 강설은 흐르는 물처럼 도도히 장내에 울려 퍼졌으며 위풍당당한 그의 모습을 찬양하는 소리가 고승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가운데는 처음부터 계속 눈물을 흘리는 한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요석공주(원효와의 사이에 설총이란 아들을 두었음)였다.

감격에 겨워 그녀는 “부처님 고맙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만 되풀이했다. 마침내 “원효대사는 살아 있는 부처님이시다”라는 외침이 장내에 쩡쩡 울렸다. 강론을 끝마친 원효는 장내의 고승들을 훑어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얼마 전 나라에서 백 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 나는 감히 그 축에 낄 수도 없었는데, 이제 하나의 대들보를 구하게 되니 비로소 나 혼자 그 역할을 하는구나”

원효(617년-686년)는 상호 모순, 대립하는 불교의 교리들을 극복하기 위해 화쟁(和諍)이라는 자신의 독특한 개념을 사용했다. 화쟁이란 어느 특정한 종파를 고집하지 않고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결시켜 사상체계를 세우고자 한 것이다. 또한 원효는 당시 왕실과 귀족 등에만 받아들여진 불교를 일반백성들에게 전파하고자 노력했다. 산속 깊숙이 자리 잡은 경천(전북 완주군 소재)의 작은 절에서 숨을 거둘 때, 원효의 나이 예순 아홉이었다.

[광주교대 명예교수·철학박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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